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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원 Aug 11. 2023

프로파일링 리뷰 : 더 문



창작자의 입장에서 시나리오 작가에 빙의해서 왜 저렇게 썼을까 집필 과정을 따라가 봅니다.      


뱁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습니까만은, 저의 있는 재주 없는 재주를 총동원해서 작품을 프로파일링 해 보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김용화 감독의 <더 문>입니다. 


*이 글은 저의 추측일 뿐,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주의사항*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또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올여름 텐트폴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인 <더 문>이 흥행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관람객들의 리뷰를 보면, 대체로 특수효과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토리는 매우 나무라더라고요. 


왜 그런 걸까요? 


왜 2백80억 원을 들린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나리오가 나무람의 대상의 되어야 할까요? 이럴 때마다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속상함을 이루 말하기가 힘듭니다. 


저는 <더 문>의 시나리오가 잘 나올 수 있었을 기회가 몇 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 겸 작가인 김용화는 아마 달에 홀로 떨어진 우주 대원을 구출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이거다 싶어서 <더 문>을 기획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본인이 대표로 있는 특수효과 회사 덱스터의 기술력을 보여주기도 좋고, 마지막에 본인의 장기인 국뽕으로 관객몰이를 하기도 좋고 말입니다. <국가대표>와 <신과 함께>의 연작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자 이제 본격 뇌피셜 프로파일링이 들어갑니다.  


감독은 아이디어가 들어간 몇 장짜리 기획안을 가지고, 투자자를 설득했을 것 같습니다. <마션>,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같은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대작을 만들겠다. 대략 내용은 이렇고, 뒤에 필살기 국뽕이 있다. 


"기획 좋네요. 근데 누가 나오나요?"


배우는 투자자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잘 나가는 배우가 아니면 지갑을 여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달에 고립되는 젊은 대원은 엑소의 도경수가 맡을 것이고, 도경수 구출을 진두 지휘할 전 우주센터장은 설경구가, 그리고 설경구의 전 부인으로 미항공우주국에서 근무하는 전문가로 김희애가 나옵니다."


그리고 투자가 결정 되었을 겁니다. 라인업이 나쁘지 않으니까요. 


저는 엑소의 도경수는 진즉에 캐스팅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엑소의 스케줄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미리 스케줄을 빼놓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게다가 엑소의 팬덤도 팬덤이지만, 해외 판매에도 도경수는 매우 유리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픽스가 됐을 것 같습니다.  


감독은 이제 집필을 시작합니다.


근데 저는 이 과정에서 투자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감독의 프로필과 특수효과, 그리고 배우 라인업만으로 지갑을 열기에는 너무 큰돈 아닙니까. 최소한 <더 문>의 하이콘셉트가 뭔지는 물어봤어야죠.  


하이 콘셉트는 제작하려는 영화가 어떤 작품인지 한 방에 알려주는 한 문장입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자나 프로듀서가 영화 제작에 앞서 제일 먼저 생각하고 정리하는 게 바로 이 하이 콘셉트입니다. 


예를 들어, <타이타닉>의 하이 콘셉트는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위의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한 방에 느낌이 오시죠? 그리고 <더 문>이 레퍼런스 중의 하나로 삼았을 <마션>의 하이 콘셉트는 무엇일까요? 제가 추측해 보기론 '화성에서의 로빈슨 크로소우'가 아니었을까요? 이해가 되시죠?


(하이 콘셉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 강의 03으로 한 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투자자들이 보통 기업에 투자할 때는 여러 가지를 체크하잖아요. 기업의 평판이나 재무제표 같은 것들도 봐야 하지만, 개발 중인 제품이 과연 소비자와 만났을 때 어떤 소구력을 가질 것인가를 면밀하게 검토합니다. 이것이 저는 영화에서는 바로 하이 콘셉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문>의 투자자는 그런 건 도외시 한 채 기업의 이력서와 제품에 들어갈 재료들만 갖고 투자 결정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더 문>은 달에 홀로 떨어진 대원을 구출한다,라는 로그라인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관객들을 후킹 할 수 있는 하이 콘셉트가 필요했습니다. 투자자가 물어보지 않았었더라도, 영화 제작사의 제작자, 프로듀서, 감독 겸 작가는 하이 콘셉트를 갖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사실 하이 콘셉트를 묻지 않은 투자자보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은 제작진들이 더 나쁠 수도 있습니다. 안 물어보니 준비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로그라인 한 줄이면 충분했다 판단했던 것일까요?



어쨌든... 


저는 <더 문>의 스토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하이 콘셉트는 바로 이거라 생각합니다.


달에서 펼쳐지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어딘가 콕 처박혀 있는 사람을 구해오는 플롯으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만 한 게 있던가요? 게다가 그 스토리에는 감독이 좋아하는 국뽕도 있잖아요. 


작법의 대가 로버트 맥키는 일찍이 '플롯은 가져오는 것이다. 크리에이티브는 플롯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플롯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라고 말했습니다. 감독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뼈대만 쏙 뽑아다가 우주선 이야기를 덮어 씌웠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감독이 하이 콘셉트를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도경수를 주연급으로 캐스팅해 놓았거든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라이언 일병은 맨 마지막에 잠깐 나옵니다. 근데 그런 역할을 주연급으로 캐스팅해 놓았으니, 시나리오가 잘 써질 리가 없습니다. 보통 우리 선수들은 그럴 때 '안 써진다'라고 표현하는데, 그 안 써지는 걸 꾸역꾸역 쓰니까 재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도경수가 나오는 씬들이 왜 재미가 없냐 하면, 인물이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수동적인 인물이 주인공이어서 잘 된 영화가 없습니다. 블록버스터에서는 더욱더 그렇죠. 어느 작법책이라도 꺼내서 주인공 편을 펴보면, '능동적일 것'이라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주선에 갇힌 도경수는 이것저것 시도해 보지만 되는 건 없이 고생만 하는 캐릭터로 나옵니다. 왜 그를 체력과 정신력만 있는 예비역 군인으로만 설정했는지 의문입니다. 아버지가 항공우주국 박사였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우주대원이 되기로 한 인물이 말입니다. 


감독도 도경수가 수동적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것 같긴 합니다. 근데 별 해결 방법이 없으니,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이나 시켜야겠다는 전략적 판단으로 고통을 주는 선택을 합니다. 타고 있는 우주선을 마구 굴리고, 도경수의 팔도 부러 뜨립니다. 하지만 그게 과하다 보니까, 관객들은 도경수에 연민을 품기보다는 자기가 고문을 받는 것처럼 괴로워하는 겁니다. 저는 4DX로 봤는데, 도경수가 우주선에서 고통을 받을 때마다 같이 뺑뺑이를 돌리니까 두 배로 힘들더라고요. 


고통을 주더라도 '삼세 번의 법칙'으로 두 번 조이고, 세 번째에는 풀어주면서 고통의 강도를 점점 세게 가져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은 고증 문제.


영화가 개봉할 때 고증이 완벽하다는 얘기를 듣고서 저는 고증이 이야기를 잡아먹지 않았을까 걱정했습니다. 달에 있는 도경수를 구출할 방법이 실제로 일어났을 경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건 다큐의 영역이고, 픽션에 영역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관객들은 다큐를 넘어서는 스펙터클을 보려고 비싼 돈을 지불한 거잖아요.  


저도 극본을 좀 쓰려고 고증을 받아보면, 처음에는 매우 협조적인 전문가들이 나중에는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겪었습니다. 자기 동료들이 드라마를 보고, 왜 저따위로 고증을 해줬냐고 비난할 것이 두려워서였던 거죠. 하지만 고증대로 했다가는 내 작가 생명이 끝날 수도 있고, 또한 시청자들도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최대한 전문가를 설득하는 편입니다. 아니면, 고증에서 이름을 빼주던가.   


 아무튼 그놈의 고증 때문인지, 인물들이 항공우주 센터 안에서 소리만 지르고 있더군요. 달에서는 도경수가 고통받고 있고, 센터에서는 전전긍긍하다가 박박 소리 지르고, 그러다 뭔가 희망이 생기면 희희낙락하고. 이 그림은 결코 관객들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을 겁니다. 


레퍼런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어떻습니까? 여러 명이 한 명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움직여가는 동선에 따라 일촉즉발의 위기들이 이어집니다. 


제 말은 설경구가 구조대원들을 태우고 달을 향해 날아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탄 우주선은 현재 실험단계에 있는 것이라면, 훨씬 긴장감이 생길 거고요. 


고증에 스토리를 맞추는 방식은 올드한 방식입니다. 최근 경향은 스토리에 최대한 고증을 맞추는 식으로 영화들이 만들어집니다. 


<더 문>은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달에 홀로 떨어진 도경수를 구출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구조대원들이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왜 한 사람을 위해 여러 사람이 희생해야 하는가 에 대한 화두를 던져야 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요.


<더 문>의 국뽕은 설경구가 발사를 강행하는 바람에 우주선이 공중 폭발했고, 그것에 대한 도의적 책임 때문에 도경수 아버지가 자살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도경수 너를 살리겠다며 의지를 불태우고, 결국 도경수를 구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감독이 감동을 주려고 연출을 과하게 하고, 설경구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연기했지만 말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감독은 국뽕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개(인적인)뽕이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미안함 때문에 너를 반드시 살리겠다는 것은 국뽕으로서 면이 안 서는 일이지 않을까요?


또 하나. 설경구가 그 과정에서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 로버트 맥키인 리사 크론은 '결말이 재미없으면 클라이맥스로 돌아가서 주인공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다시 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 봤더니, 설경구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걸로 해결을 했더라고요. 목이 좀 쉬었을 것 같긴 했습니다. 


반면, 미항공우주국에서 근무하는 김희애는 어땠나요? 미국을 배신한 대가로 직위해제 되고 체포까지 되죠. 나름 대가를 제대로 치릅니다. 따라서 약간 감동이 있었지만, 사실 김희애의 스토리는 이야기의 본류는 아닙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더 문>이 엄청난 국뽕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관객수 천만은 아무 작품에게나 오지 않습니다. 저는 국민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어떤 결핍과 영화와 맞물릴 때 천만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범죄도시>가 시나리오의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천만을 가는 이유는 온갖 흉폭한 범죄자들이 날뛰는 데도 공권력이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그 정의에 대한 사회적 결핍을 마석도라는 캐릭터가 확실하게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문>에서는 국뽕을 개뽕으로 가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국뽕은 국뽕으로 갔어야죠. 


저라면 도경수를 좀 더 평범한 캐릭터로 설정했을 것 같습니다. 달나라 여행 경품 공모에 뽑힌 평범한 우리 이웃사람 말입니다. 그런 캐릭터에 관객들은 더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왜냐하면, 내게도 가능한 일일 수 있잖아요. 뽑기만 잘하면 되니까. 근데 그런 인물이 우주 미아가 되는 겁니다. 그의 가족들은 절망할 겁니다. 우리 아들 구해 달라. 아마 관객들은 여기서부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내가 저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구하러 와줄까?


솔직히 말해, 평범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우주선 쏜다든가 하는 것은 본전도 안 나오는 일입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일인당 수입억 씩 들여 키운 우주 대원들을 비싼 우주선에 태워 구출 작전에 나서는 겁니다.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평범한 시민을 구하기 위해 몇 조를 들이는 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드라마는 그래야 합니다. 때론 돈을 따질 수 없는 일들이 있는 겁니다. 당연히 찬반이 있고, 대원들 사이에도 격론이 오갑니다. 하지만 명령이기에 그들을 가야 하는 겁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국가에 속한 국민이지만 국가로부터 제대로 보호받고 있는가 생각하면, 선뜻 대답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보호라는 것이 국민들 잠재의식 속에 결핍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세월호 사건 이후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핵심은 과연 국가가 왜 존재하는가 아니었습니까? 세금 따박따박 내고 애국심을 가슴에 품고 성실하게 살면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국가 시스템이 엉망이라 생때같은 아이들을 수장시키고 말았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언제 어디에 있건, 국가는 당신 곁에 있다! 


이런 메시지를 <더 문>이 제대로 던져줬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이런 최악의 흥행 실패는 없지 않았을까요? 저는 오히려 천만을 너끈하게 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저의 뇌피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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