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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내 Nov 17. 2023

정규직과 계약직 그 경계에서

성냥팔이소녀와 포카혼타스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옆 교무실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원장님,

생일 축하합니다.”


“바쁜데 뭘 이런 걸 준비했냐 “라고 타박하는 원장님의 목소리가 하이톤이다. 그 행복한 소리를 들으면서 짐짓 이따가 원장님께 '생신 축하합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르는 척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벌써 짧은 점심시간이 끝났다. 결국 타이밍이 안 맞아서 축하한다는 이야기는 못했다.



길었던 유학생활은 나의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토 미국애들이랑은 언어와 문화장벽으로 거리가 있었고, 친해질 만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 학생들은 결국 공항에서 연이 끝났다. (당시엔 SNS가 발달된 시절도 아니고, 계속 끊기던 스카이프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나도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는 한 앞장서서 도와주지 않는, 목을 등껍질 속에 쑥 집어넣은 거북이 같은 사람이 됐다. “Just let me know if you need help”같은 친절한 공수표만 건넨다. 


주기적으로 오는 얇디얇은 인간관계의 허탈함과 환멸감은 한국에 와서도 지속됐다. 직장생활이든 동호회든 모임에 나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하지만 인스턴트 인연의 끈은 쉽게 끊어졌다. 취업을 해서, 결혼을 해서, (돈 쓰는) 취미가 달라서, 시간이 안 맞아서 등 조금만 안 맞아도 맞춰볼 노력은 안 했고, "그냥 여기까지 인가보다" 하고 나만의 동굴인 공부 세계로 기어들어갔다. 



전임 시간강사는 유치원의 이방인 같은 존재다. 예쁘게 담겨있는 꿀떡들 사이에 혼자 쑥떡인 것처럼 교무실에 소속감이 없다. 유치원 특유의 챙겨주기 문화가 어색하다. 돌아가며 챙겨주는 생일 축하 의무는 없고, 당연히 당직의 의무도 없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도 내 생일을 아무도 모르고, 명절 선물 명단에서도 제외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커피를 쏘는 날에는 어김없이 내가 마시는 아이스라떼가 배달된다. 나 역시 짧게 다녀온 동남아 여행에서 유치원 선생님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사 왔다. 최소한의 성의만 표현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인 것처럼 거리감이 존재한다.


몇 달 전 5년 동안 근무했던 전 직장 동료 선생님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도착하니 예전 선생님들을 봐서 기분은 좋았는데, 역시나 선생님들과 나 사이엔 어색한 거리감이 있었다. 안부 인사를 주고받으면 더 이상의 할 말이 없어지는 그 거리감. 분명히 인스타에서 매 번 좋아요를 눌렀는데, 이 알 수 없는 거리감은 어디에서 기인했나. 과거 추억 팔이 없이 식이 시작되기 전 30분 동안 앉아 있기엔 미묘하게 어색한 사이이다.

둘째를 안고 첫째의 페이스메이커 하는 나를 우연히 만난 선생님이 찍어 주셨다. 남편이 없었던 날이라 선생님이 찍어주신 이 사진이 유일한 가족 사진이 됐다.


끊어진 인연은 어디선가 다시 불쑥 튀어나온다. 여름의 끝자락에 어린이 철인 3종 경기에 나갔다. 하필 남편이 오전에 급한 취재가 생겨서, 혼자 애 둘을 데리고 경기장으로 갔다. 첫째의 달리기 페이스에 맞춰 둘째를 안고 달리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결승점 언저리에서 누가 "해내네 선생님!"하고 소리쳤고, 거기엔 전 유치원 동료 선생님이 있었다. 서로의 결혼식 이후, 우연히 처음 만난 곳이 이 폭우 속 경기장 이라니. 애들은 천막 밖에서 비를 맞으며 똥개처럼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급변한 날씨에도 다음 경기에 나가냐며 꺌꺌 거리는 비현실적 만남이었다. 



창문 너머에 있는 따뜻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었던 성냥팔이 소녀와 바람이 이끄는 대로 살았던 포카혼타스 사이에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고민해 본다. 생각해 보니 자유분방하게 자연 속에서 영원히 살 것 같았던 포카혼타스도 결국 영국으로 건너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영국 사교계에 들어갔다. 나도 역시 교무실에 속하고 싶은 것일까. 그럼 이렇게 얇은 끈으로만 이루어진 인간관계는 실패한 것일까.


불교 용어에는 시절인연이 있다.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시절인연. 유학시절 만났던, 지금은 연락도 잘 안 되는 친구들은 20대의 찬란하게 눈부신 시절에 미국에 있어서 만날 수 있었던 시절 인연이다. 아이를 낳고 아이의 50일의 기적을 공유하고 축하해 줬던, 막막했던 육아라이프의 든든한 동지들이 있었다. 매일 서로의 집에 돌아가며 놀러 다녔지만, 이젠 소아과에서 우연히 만나야 인사하는 시절 인연이 되었다. 누가 이 시절인연을 나쁘다고 할까. 그 시절과 그 장소에 있던 소중한 인연인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멀어진 인연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지금은 교무실 소속은 아니지만, 교무실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이 얇은 끈으로 이루어진 인연은 우연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착하게 살자. 언제 어디서 인연의 끈이 다시 이어질지 모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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