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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내 Mar 01. 2024

아니, 요즘 누가 집들이를 해

그게 우리 집 집들이라고?


집들이 [집뜨리] : 이사한 후에 이웃과 친지를 불러 집을 구경시키고 음식을 대접하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우리 집들이는 언제쯤 하면 좋을까?"라는 남편의 질문에, "아니 요즘도 집들이하는 곳이 있어?" 라며 완곡한 거절의 대답을 했다.


하지만, 라인을 못 읽은 건지, 못 읽는 척한 건지 남편은 이사를 하고 난 이후에도 집들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분양받은 이 아파트는 청약당시 남편네 팀원 전체가 다 청약접수를 했고, 그중 모델하우스를 한 번도 안 갔던 우리가 당첨됐다. 거기에 결혼식-첫째-둘째 출산-시어머니의 장례식까지, 남편이 입사하고 짧은기간 동안 모두 일어난 일이다. 남편은 나름 팀원들에게 고마운 표시를 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정한 집들이의 날이 왔다.



어른 7명 + 아이 1명을 집들이에 초대하고는 "넌 가만히 앉아만 있어. 내가 다 준비할게"라고 말한 남편.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우리 집에 초장그릇 8개 있어?"


(세상에, 요즘 어느 집이 초장그릇이 8개 있니. 수저세트도 5개가 안 되는 판에. 그냥 일회용을 사야지.) "이따가 마트 가서 일회용품 사야지"라고 답장을 보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장을 봐온걸 보니, 먹는 것은 잔뜩 있는데, 일회용 접시가 없다.


"그냥 집에 있는 그릇 쓰려고. 쓰고 식세기 돌리면 되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기가 설거지를 할 테니 걱정하지 말란다.


계속 도착하는 요리들. 자기가 다 할꺼라는 남편은 정말 “요리만” 샀다.


집들이 시간에 맞춰, (남편이 지난 일주일 동안 고심 끝에 고른) 메뉴들이 하나씩 도착한다. 회, 족발, 치킨에 혹시 모자를 경우를 대비한 곱창전골 밀키트. 후식으로 먹을 킹스베리와 한라봉, 감자칩, 견과류 까지 참 야무지게 시켰다. 그리고 나의 일이 시작됐다. 먼저 회랑 같이 온 매운탕을 끓이는데, 당연히 덜어먹을 앞접시는 없고요. 초장접시 없고요. 숟가락, 젓가락도 없어요. 결국 애들의 이케아 그릇까지 총동원이다.


오자마자 S부장이 (기자는 펜 앞에서 평등하단 이유인지 직급 뒤에 님을 붙이지 않는다. a 부장, b 부장, w 차장 그냥 이렇게 부름) 강남에서 좋은 기운으로 유명한 꽃집에서 산 꽃다발을 건넨다. 워낙 유명해서 대기업회장들도 사가는 곳이라는걸 특별히 강조하신다.


다음 집들이는 강남에서 하길 바라는 의미로 사 왔습니다~


꽃을 사는 돈도 아까운 현금부족인 영끌족이라 오랜만에 맡아보는 꽃냄새가 너무 좋다. (꽃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던건 덤)


주방에서 종종거리며 남자 8명의 수다를 들으니 괜히 내적친밀감이 쌓인다.


11시에 요리한 계란후라이와 두부김치


큰 일이다. 집들이 시작 후 2시간이 지났는데, 남편이 준비한 음식이 다 떨어져 간다. 술에 흥이 오른 남편은 목소리 톤은 높아졌고 비틀비틀거리기 시작한다. 나에게 와서 "집에 뭐 먹을 거 없어?"라고 슬쩍 물어본다.

"네가 다 알아서 한다며?"라고 조용히 물어봐도 술에 취한 자는 이미 방으로 사라졌다. 부랴부랴 두부김치도 하고 계란후라이도 했다. 그렇게 계란후라이 12개까지 서빙을 하고 나니 집들이를 마쳤다.


남편은 이미 만취상태로 방에서 자고 있었고, 나와 4살 7살 애들이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 라며 배꼽 인사를 집들이는 끝났다. 부랴부랴 애들을 11시 30분에 재우고, 집을 둘러보니 내가 잘 곳이 없다.


자기가 다 한다는 남편은 어디갔니


집 안에서는 매운탕의 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고, 바닥에는 온갖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다. 음식물과 배달음식과 함께 온 일회용을 치우고, 쓸고, 닦고, 설거지를 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 3L짜리 두 개를 꽉꽉 채우고, 식세기를 두 번째 돌렸다. 온몸에서 나는 매운탕 비린내를 씻어내는 샤워를 끝으로 남편의 집들이는 정말로 끝났다.


집들이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자고 계심.


내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어땠는지 생각해 보니 놀랍게도!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매일 내가 한 요리를 먹는 것도 싫었고, 어차피 치우는 것도 내 몫이니 동네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고, 집에서는 간단하게 차나 커피정도만 마셨다. 초대한 사람들 (대부분 애엄마들) 역시 바깥에서 먹는 게 당연하다고 느꼈다. (애들 없이 외식이라니! 먹고 안 치워도 된다니!)


어제 하루 종일 주방에서 동동거린 나를 생각하니, 내가 손님 8명을 초대해도 남편이 나처럼 일을 할까 싶다. 나도 술에 취해서, 아니 평범한 데일리로 먹는 저녁. 피곤해서 잠자고 일어나면 애들 잠자리며, 설거지며, 정리가 다 되어있는 날이 오긴 할는지.


새벽부터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는 남편을 보니 짠함과 괘씸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직도 술이 덜 깨서 토하고 자고를 반복하는 남편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 삼일절맞이 등산이나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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