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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Oct 15. 2018

뭘 이렇게 감추며 살아가는 걸까

자존심 때문에 사소한 것도 감추고 사는게 어른이 되는건 아닐텐데.

 가마쿠라는 도쿄 도심에서는 전철로 한시간은 가야 하는 교외지역이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거지로 선망받는 지역. 바다가 가까워 서퍼들이 모여들고, 다양한 품종의 가마쿠라 야채가 재배되어 쉐프를 꿈꾸는 사람들도 모여든다. 품질 좋은 가마쿠라 야채를 입수하기 쉬워서, 그리고 자연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역이기 때문에도 가마쿠라에는 마크로비오틱 음식점이나 요리교실도 부쩍 늘고 있다. 


 쿠킹스쿨 리마에서 만난 동기들 중 히카리짱도 가마쿠라의 마크로비오틱 음식점, 나츄데코에서 일하고 있다. 도쿄에 온 김에 가마쿠라 채소 구경도 하고 싶었고, 이런 히카리짱을 다시 만나고 싶기도 해 조금은 멀지만 평일에 시간을 내 가마쿠라에 다녀오기로 했다. 


 왠지 나는 나오 언니와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오 언니는 나와 비슷한 입맛을 가져 저염콤비라고도 불리며, 초급부터 상급까지 같은 코스를 들어온 동기. 하지만 요즘에는 선뜻 누군가에게 함께 뭔가를 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 망설여 진다. 누군가가 내게 뜬금없이 무언가 제안을 하면, 그 뒤에 무슨 목적이 있는건지 추측부터 시작하는 버릇이 생겨서일까. 혹은 이런 제안이 상대방에게 실례가 되는 건 아닌지 지레 겁을 먹어서 일까. 아니 그저 자존심이 세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행여 거절당하더라도 남자에게 차이는 것도 아니니, 슬그머니 물어봤다. 이게 웬걸. 언니는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응해줬다.


 ‘가마쿠라 재밌을 것 같아! 나 평일에도 비교적 한가하니까 같이 가자.’


 그렇게 평일에 한가한 두사람이 의기투합해 우리는 함께 가마쿠라에 가게 됐다. 


 가마쿠라 역에서 만나 시장도 둘러보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히카리짱의 카페에 도착했다. 리마의 조리실 밖에서, 쉐프복을 입은 히카리짱을 보니 우리 막내둥이가 맞나 싶었다. 

나츄데코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아늑한 공간이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언니와 대화를 이어갔다.


“혜연상도 사범까지 진학할거지? 수업이 주말이어도, 금요일이랑 월요일에는 회사를 쉬어야 겠네. 나라면 연차가 아까워서 못쓸텐데 대단하다.”


 그렇다. 사실 나는 리마의 동기들과 선생님들에게는 회사를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여기에 왔다고 하면 다들 많이 놀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만나지 않을 이들에게 굳이 퇴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스스로 벽을 쌓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한 번 대충 둘러대고 나니,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렸다. 


 내가 불편해서라도 나오 언니를 더 이상 속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듣고 다행히 나오 언니는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나오 언니의 숨겨 왔던 이야기도 내게 들려줬다. 

함께 나츄데코의 마크로비오틱 정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치고 히카리짱과도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나츄데코를 나와 걸었다. 걷다보니 가마쿠라의 해변이 나왔다. 바다 한번 못보고 조리실에서 우엉을 썰며 내 20대 마지막 여름을 보내나 싶었지만, 가마쿠라에서 바다를 볼수 있었다. 

 약간은 흐린 여름 날. 바닷가를 걸으며 우리는 이런이야기 저런이야기를 꽤나 오래나눴다. 내가 왜 일본에서 유학을 하게 됐는지, 나오 언니가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남자아이 등등에 대해 얘기했는데 사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내용은 많이 기억이 안난다.


 분명 엄청 재밌는 내용은 아니었던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저 그 시간이 소중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나중에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바람을 맞으며 바닷가 옆 길을 나란히 걸어가며 얘기를 나누던 순간만큼은 오래 기억될것같다.


 내용보다도 그 순간의 경험이 중요할때가 많다. 

 그리고 그 경험을 만들어주는 요소에는 ‘사람’이 있다. 소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나눈다는 것 만으로 기억은 추억이 되고 아름답게 기억된다.


 누구에게나 그들의 소중한 순간을 만들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몇몇있다. 그 많지 않은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솔직하게 그들에게 내가 가진 애정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사소하지만 큰 행복이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돌고 돌아 거의 30년을 채우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른이 돼가며 이런 솔직한 마음을 감추고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늘 무거운 마음을 갖고 있던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갖고 살았을 뿐. 그렇게 언제나 내 마음이 무거웠던건 아니지만, 나오 언니와 가마쿠라에 다녀오고, 나의 퇴사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나는 조금 더 심플해졌다.


  ‘그냥’이 내게는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을 때는, 나를 납득시키기 위해 인과관계를 만들어보려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솔직해지니, 때로는 신기하게도 인과관계라는 것이 없이, ‘그냥’ 좋아서 좋은 것들이 있더라. 나의 옆집 친구가 그냥 좋고, 가족들과 함께 사는게 그냥 좋은 것처럼.


 그렇게 나는 앞으로 조금더 ‘그냥’에 익숙해져 보련다. 어려운 말 하고, 감추며 사는게 어른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내 마음에 솔직하게, 인과관계는 내려놓고, 나의 좋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나의 애정을 쏟으며 살아가야지.


 그냥 그게 좋으니까.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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