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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 READING GOING Dec 18. 2021

걸었다

굳은 다짐으로 집을 떠난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


여행은 많이 했지만, 장시간 가족과 떨어진 생활에 자유를 느꼈다.

그런데, 24시간 학교에 머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은 개인 공간이었다.

강의실에도, 세 명이 함께 쓰는 기숙사에도,

그리 크지 않은 도서관도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잠시 조용하다가도  사람이 들어왔다.

그러면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참 많이 걸었다.

둘이서도 걷고

여러 명과도 걷고

가장 많이 나 홀로 걸었다.


조용한 길을 걸으며

언젠가 꿈꾸었던 유럽의 한적한 숲 길의 산책을 떠올렸다.     

조금 심각하게 걸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중단할 것 같은 두려움 속에 걸었다.


내가 가지고 온 재정이 모두 바닥이 났고

아버지는 입금하시지 않고 그냥 들어오라고만 하셨다.

가족과의 갈등도 싫었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이 상황이 너무 힘겨워서 도피하고 싶어서 그냥 걷고 또 걸었다.   

  

낯선 곳이었다.

얼마만큼 걸었을까?

처음 보는 골프장이 보였다.

담장 안의  잔디는 나의 감정과 무관하게 너무 단정했다. 

담장 밖의 낡은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경계를 느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왔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늘은 구름의 이동에 따라 계속 변했다.

구름은 계속 흘러 흘러 파노라마처럼  변했다.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가 들려졌다. 

지금 이 세상에

이 하늘 이 구름을 보고 있는 사람이

너 혼자여도 나는 너 하나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단다.

두려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이 길을 계속 걷지 않겠니?    

      

음...

이상하다.

난 울지 않았다.     

하늘이, 바람이, 나무들이 들려주는 자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다시 걸었다.


다시 학교로 걸어갔다.


사람 많은 공간도 나에게 살아 움직이는 선물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했고,

학비가 입금되었다.  

    

걸었다.

또 걸었다.

지난 걸음과는 다른 걸음이다.


새롭게 이 걸음 후에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나는 또 걸었다.    


지금도

나는

계속 

계속해서

걷고 있다.


나는 

아직

걷는 중이다.  


계속 

걸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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