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림책 READING GOING Dec 18. 2021

육이오

몇 년 전부터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산으로 이사해서 적응하는 기간이겠다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길을 잃고 경찰서에서 온 연락에 너무 놀라서 아버지를 탓하기도 했다.

친구의 권유와 도움으로 어렵게 장기요양등급을 받았지만,

데이케어센터에 가셔야한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고 외면하고만 싶었다.


일산에서 몇 달 동안 기관을 어렵게 다녔지만, 

결국은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여러 기관의 정보를 알아보았지만

남자 어르신을 수용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정말 기적처럼 좋은 데이케어센터를 만났다. 


매주 발송되는 가정통신문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사진 속의 얼굴을 

찾는 것은 보호자가 된 작은 기쁨이었다. 

많은 분들의 정성스러운 돌봄 속에

나름대로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이 계속 되었다.


그 분들의 도움이 없다면 아버지께서 어떤 시간을 보내셨을까?

집에 가면 아버지께서 미술활동의 작업물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데이케어센터의 행사에 밝게 웃고 계신 아버지는 낯설었다.


기억을 잃기 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치매 환자 인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냥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버지를 맞이하려다가

어머니께서 얕은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아파트 관리소의 연락을 받았다.

허둥지둥 병원으로 갔더니 

의사소통이 어려워 더 이상 보호자가 될 수 없는 아버지는

“괜찮아?”를 반복하면서 응급실 침대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안한 눈빛은 마치 주인 잃은 강아지 같았다.

입원절차를 위해 뛰어다니면서도 

아버지를 어떻게 돌봐 드려야할지  그 저녁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어머니가 병원 입원 중 아버지를 주말에 돌봐드릴 수가 없어서

결국 두 군데의 데이케어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두 달여 동안 아버지는 눈에 띄지 않던 낯선 행동들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집에 가자고 했다.

아버지의 기억 속 그 집이 어딘지 

빨리 우리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6개월에 한 번씩 세브란스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통해서 확인받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치매 증상은 계속 악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다시 낯설게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당황스러웠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 알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앨범을 뒤적이다가 헐렁한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간다고 나서는 것을 반복했다.

아프셨지만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깔끔하시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힘겹고 낯선 상황은 무거운 짐이 되었다.     

크고 작은 아버지의 이상 행동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친절하던 데이케어센터 직원들에게 당황스럽고 다급한 연락이 계속 왔다.

작은 물건에 집착하고, 함께 생활하는 분들과 사소한 다툼이 반복되었다.

저녁에 귀가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취침 약을 복용했지만 한 시간을 주무시지 않고 집 안에서의 배회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부터 핸드폰 받기가 두려웠는데 받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연결되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더 이상 아빠를 돌볼 수 없으니 

빨리 모시고 가면서 퇴소하라고 한다.

근무 중에 허겁지겁 달려왔더니

소리 지르며 발버둥치는 처음 보는 모습의 아버지.

계속 나가려는 아버지를 붙잡았던 양쪽 팔은 사람들의 손길로 피멍이 들어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울면서 아버지와 집으로 가야했다.


아파트 입구 의자에 앉아서 아빠와 잠시 앉았다.

어느새 검게 피멍이 든 아빠의 팔은 절망으로 물든 나의 모습 같았다.

그 와중에 울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울지마”를 계속  반복하셨다.

더 이상 데이케어센터에  갈 수도 없고,

이곳 저곳에 긴급돌봄을 알아봤지만, 

당장 내일부터 아버지를 모실 곳이 없었다.


가족들은 아빠를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어려운 결정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오늘 밤만이라도 잘 주무셨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힘겨워했다. 

    

다음 날, 이른 여름 날씨가 너무 무더웠다.

입원을 위해 짐을 정리하는데, 생각할 것도 준비할 것도 많았다.

아버지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데,

언제 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제 진짜 아버지의 집으로 가시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 났다.   

       

너무나 무더웠다.


아기가 되어버린 아버지.

파란 환자복을 입고 처음으로 병원 침대에 앉아계셨다.


아버지의 작은 눈은 아기처럼 맑았다.


아버지가 입원하신 날.

아버지와 떨어져서 어머니가 처음으로 따로 주무시던 날.

아버지가 누웠던 어머니의 옆자리에서

어머니도 나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낯설고, 허전하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두려움과 허전함이 가득했다.


그 날은 2019년 6월 25일이었다.     


어느새 2020년 6월 25일이 지났다.


음... 아버지는 진짜 집으로 가셨다.


코로나19가 최정점이었던 3월 11일.

아버지가 사랑하는 동생의 생일날에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아버지는 하늘나라 진짜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셨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더 감사할 수 있었는데...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625전쟁 70주년인 2020년.


황해도 실향민으로 고향을 잃은 아버지는 


하늘나라 본향에 잘 계시겠지.     


6월 25일은

625는 또 다른 나의 기념일이 되었다.               

이전 05화 걸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