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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Sep 28. 2018

천천히 차분하게 걸었던 곳 세비야

다녀올게요 여행 : 포토에세이


비의 향기


따뜻하고 포근했던 론다에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늦은 오후 버스를 타고 세비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내 몸도 지쳤는지 씻고 눕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시간은 푹 쉬고 내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어제의 일정이 피곤했는지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숙소의 커튼을 한 손으로 밀어내어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밤사이 비가 왔는지 밖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매워져 있었으며 순간 아마 오늘은 해를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문득 지나갔다. 대충 씻고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간다. 생각보다 많이 쌀쌀했다. 따뜻한 음료가 생각나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나온다. 촉촉한 날씨에서 특유의 감성적인 냄새가 난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하니 하루가 나름 낭만적으로 시작한 거 같아 기분이 좋다. 짧은 여행이지만 날씨가 매일 좋은 것보단 가끔 이런 식의 날씨가 나에게 많은 걸 느끼게 해준다. 햇살이 비추는 세비야는 훨씬 반짝이고 이뻤을지도 모르지만 습기를 머금은 세비야도 충분히 만족할 만 하다.


스페인의 4대 도시 답게 이른 아침부터 광장 주변은 관광객들과 학생들로 분주하다. 세비야는 이것저것 볼 것이 많이 있는 거 같다. 나는 도시를 한 바퀴 둘러 보고 싶어 무작정 걷기로 한다. 오기 전까지는 도시 자체가 클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었는데 한참을 걷고 걸어도 구석구석 볼거리가 참 많았다. 공원에서는 소규모 공연도 있었고 체험학습을 나온 학생들과 관광객들로 광장은 북적였다.




시간의 경계


 사람이 많은 광장을 빠져나와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 강가로 향했다. 이 강은 옛날 우리나라의 한강과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그 규모는 한강에 비에 크진 않지만, 수심이 깊고 유량도 많아 항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로 인해 세비야는 스페인의 대항해 시대의 첫 관문이자 제국의 1의 무역도시로 이름을 날렸었다. 또한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예전의 명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은 아주 작아져서 관광용 유람선이나 각종 체육 활동을 등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광장에 비해 강 옆의 산책로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천히 강을 따라 산책을 하며 사색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었다. 다리가 욱신욱신하여 잠깐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가기로 한다. 강 건너 편에 알록달록 보이는 집들이 마치 레고블록을 쌓아 놓은 듯이 아기자기하게 귀엽게 보인다. 잔잔한 강 위에는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물결을 따라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어느덧 시간은 늦은 오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더 둘러볼 요량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발걸음을 옮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한 장면에서 꽂히는 순간이 있는데 세비야에 와서도 그런 장면을 마주 하고 말았다. 한창 이동 중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꼬마들이 열심히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 유치원이나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동네 친구들과 한게임을 하고 들어갈 요량이었나보다. 엄마들은 관중이 되어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조그만 키에 배가 불룩 나온 귀여운 아이는 마치 호날두나 메시가 된 것마냥 공을 향해 연신 달려들었고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어찌나 귀엽던지 한참이나 서서 아이들의 축구를 관람하였다. 마치 엘클라시코를 보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상기되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봤는지 해는 저만치 저물어 있었다. 이내 엄마들도 시간이 늦었는지 각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아쉽게 승부를 알진 못했지만 많은 여운을 남긴 경기가 틀림없었다.


스페인의 여행하다 보면 해질녘쯤 푸르스름하게 새벽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나는 그때의 모습이 너무나 좋다. 말로는 형용할 순 없지만 무언가 낮의 세상은 저물고 밤의 세계가 시작되는 느낌이랄까? 낮과는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됨을 알리는 느낌이 든다. 이 시간은 굉장히 짧지만 큰 여운을 남겨준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세비야 도로 옆에는 가로수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나무들에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그냥 무심결에 봤는데 그 모습이 오렌지처럼 생겨 신기해했었는데 마침 밤중에 그 열매를 떨어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 오렌지가 맞았었다. 가로수가 오렌지 나무일 줄이야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하면서 황당한 미소를 지었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으니 거리에 온통 붉은 빛의 가로등이 일제히 켜진다. 가로등 하나하나가 오래된 작품처럼 빛이 나니 왠지 모르게 과거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온 거 같았다. 도시는 낮만큼이나 밤에도 많은 사람으로 골목은 채워졌다. 거리와 식당에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크지 않게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밤 날씨는 쌀쌀했지만, 분위기 만큼은 가로등의 빛처럼 따뜻함이 느껴졌다. 거리에는 많은 연인이 손을 다정하게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쉽사리 볼 수 있었다. 마치 밤이 되면 나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뿌옇게 퍼지는 빛들 사이사이로 무슨 마법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이미 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이런 감정을 놓치기 싫어 한참이나 그렇게 벤치에 앉아 촉촉하게 젖은 밤의 향기를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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