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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Aug 11. 2021

번아웃된 당신이 꼭 알아야 할 한 가지

훌륭한 사람 말고 그냥 아무나 돼도 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완벽주의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효율성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다.  시간에 허덕인다. 여유도 즐거움도 모른다. 그러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다. 커홀릭일 때의 내 모습이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천천히 감정의 부산물들이 비워져 나갔다. 내 글들을 관통하는 기조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였다. 타인의 인정 욕구에 집착하는 내가 문제였다. 완벽주의에 취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내가 문제였다. 누가 여유 부리지 말랬나? 본인이 선택한 길인 걸. 누가 효율적으로 살랬나? 성공하려고 욕심부린 게 문제지.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분명 나한테 누가 속삭였. 성공하려면 여유 부리지 말라고."


끊임없는 속삭임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 청소년기의 나, 대학생이 된 나를 거쳐 30대 중반이 된 지금의 나에게까지 들리는 속삭임. 나는 다시 되묻고 싶었다. 개인이 이런 속삭임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정말 나만 문제일까? 내가 겪는 이 고통에 누구도 아무런 책임이 없나?





JTBC <한끼줍쇼> 중.


초등학생에게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른들의 일반적인 덕담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게 문제다.) 기존 세대가 만들어 놓은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승자가 되는, 전형적 의미의 '성공'을 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효리는 그 말에 반감을 표시한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이효리의 이 '아무나'라는 말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 초등학생이 어른들의 말 때문에 공부에만 집착하고 다른 가치들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1등을 차지할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다. 사회는 이미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는 마치 모든 사람이 1등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부추긴다. 놀지 말고 열심히 하도록. 자신 최대치의 생산성을 뽑아내도록.



사회학자 로드리게즈는 '현대사회는 사람들에게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며, 사람에게는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려는 욕구가 있다'라고 말했다. 또 그에 따르면, "문화는 개인들보다 힘이 세다."
- 브리짓 슐트, <타임 푸어>



사회가 나에게 속삭였던 성공의 가치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 왔다. 미디어 속 성공 신화나 주변의 성공 사례는 죽도록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를 내게 남겼다. 질투심과 자괴감에 괴로웠다가도, 그건 어느새 나의 동력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존버'하고 말 그대로 '노오오오력'했다.


하지만 사회는 단 한 번도 내가 얼마나 깊어지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와 같은. 내가 어디까지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나는 멈추었다. 처음에는 그 멈춤초조했다. 그러나 오히려 판 밖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제야 선수들을 출발선에 줄 세워 놓는 거대한 손의 존재가 보였던 것이다. 대규모 마라톤 경주였다. 일단 세팅만 해 놓으면 사람들은 알아서 움직였다. 거대한 손은 가끔 '불안'의 가루만 솔솔 뿌려주면 되었다. 1등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완주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불안을 먹고사는 사람들과, 불안으로 굴러가는 사회. 나도 그 안의 충실한 러너였다. 왜 내가  달리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번아웃은 처음부터 심리학의 영역을 초월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기 자신과의 투쟁, 그리고 좌절감을 주는 환경과의 투쟁은 결국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다. 현 노동 세계에서 이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여러 요인들을 살펴보면, 현대의 번아웃 역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 파스칼 샤보, <너무 성실해서 아픈 당신을 위한 처방전>



물론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괴로운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거나, 성공을 좇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꾸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사회가 세팅해 놓은 판 속에 무작정 휘둘리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별을 따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다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파스칼 샤보가 말했듯, "인간을 더욱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간을 괴롭히거나 혹은 인간의 한계를 놓고 사기극을 벌이는 모든 시스템은 그 어떤 것도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에 조금 더 분노할 필요가 있다. 끝없이 우리를 내모는 이 구조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 당장 커다란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변화가 감지될 것이다. 더 나은 일의 형태와 성공의 새로운 정의를 고민하게 될 것이며, 연대할 수 있는 용기가 차오를 것이다. 기성세대의 성벽에 균열을 내고 성공의 덫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이지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물론, 아까의 초등학생처럼 앞으로 사회에 나올 다음 세대에게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독한 번아웃과 관련해 나의 나약함만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건 '사회 탓'도 있다.


 

출처 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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