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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Sep 23. 2021

무기력을 극복한다는 것

본격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겐 넥스트 스텝이 없다구



급성 허리디스크로 모든 것이 멈춘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20년 11월 4일,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날의 기억. 허리 상태는 그때에 비하면 정말 좋아졌다. 운동이라고는 치를 떨었던 내가 재활 운동을 주 3회 꼬박꼬박 나간 쾌거다. 조금 나았다고 한 달 동안 운동을 하지 않았더니 금세 허리디스크가 재발한 적도 있었다. 후회의 눈물을 삼키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제발 ... 이번만 넘기자. 좋아지기만 한다면 내 다시는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으리.' 다행히 허리 상태는 곧 좋아졌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면 몸은 참 정직하다. 어쨌든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가져다주니까.


그럼, 마음은? 마음도 그럴까?






허리디스크로 꼼짝없이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강제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누리지 못했던 전혀 다른 질감의 시간들이었다. '나'에게 집중된 머릿속의 질문들. 그 질문들은 특히 '마음'에 관한 것이었다.


너는 누구니?
무엇을 좋아하니?
어떻게 살고 싶니?
지금 행복하니?



처음엔 거센 물살을 타고 무너진 둑으로 들이닥치는 질문들이 너무 버거웠다. 울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강하게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이기고 있었다. 그때는 내 생각이 뭐고 마음이 뭐고 누가 누구를 이기고 있는지도 사실 몰랐지만.



무작정 읽고 쓰기


혼돈의 시간에 내가 선택한 것은 글쓰기와 책읽기였다. 머릿속에 생각들이 마구 소용돌이치면 글을 쓰면서 그걸 쏟아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은 '치유의 글쓰기'라고 불렀다. 그렇게 비워져 나간 내 안의 공간들은 내가 붙들고 읽어 내려간 책 속의 구절들로 다시 채워졌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을 택한 거였다.



심리상담 하기


심리상담도 해보았는데 당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음의 지반이 너무 연약해져 버린 탓이다. 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자극이 너무 컸다. 하지만 지금에 와 그 내용들을 곱씹으면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도움을 받고 싶다면 내 상태가 어떤지 먼저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



좋아하는 거 닥치는 대로 해보기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라면 다 해봤다. 아이패드에 드로잉을 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SNS에서 내 그림을 보고 몇몇이 즐거워해 주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걸 할 생각을 하자 또다시 숨이 막혔다. 그때 알았다. '아, 나는 지금 뭘 본격적으로 할 수 없는 상태구나.'




이것저것 하고 있으니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마음의 무기력에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발짝 나가려 하면 나를 감고 있는 불안과 무기력은 더욱 강하게 죄어 왔다. 뭔가 본격적으로 한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왔다.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미래의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하는 순간 숨이 막혔다.





나는 나의 번아웃을 진심으로 인정했었나. 아니다. 그동안 '번(burn)'해서 다 타버린 상태를 인정하지 못했다. 번아웃 '극복'이 최대 과제였다. 내가 무기력한 건 그냥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데.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나아지기를 강요했다.


어차피 전전긍긍 하든 말든 결과는 똑같은 거. 아니, 오히려 더 안 좋게 흘러가는 거. 그래서 이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무기력이 디폴트여도 괜찮다. 넥스트 스텝을 자꾸 생각하지 말자.
'이제 슬슬 정신 차려야 할 때'란 건 없다.
남들보다는 안 힘든데 내가 이렇게 힘들어해도 되냐고?
힘든데 자격증 급수까지 따져야 되나. 내가 힘들면, 그냥 힘든 거다.




특히 몸이 주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허리는 안 아파도 피부가 이유 없이 뒤집어지고 소화가 안 되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는 쉬라는 뜻이다. 내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었는데도 그렇다고? 그럼 마음이 시끄러웠던 날일 가능성이 높다. 속으로 나한테 채찍질했던 날은 아니었는지 돌이켜보자. 몸이 주는 신호는 생각보다 정확하다. 그때는 쉬어도 괜찮다. 쉬어야 한다.



쉬어도 괜찮아.
포기해도 괜찮아.
도망가도 괜찮아.



도망가는 게 뭐 어때서? 생각만 해도 구역질 나는 일에서 벗어나는 건 본능이다. 제발 쉬자. 포기할 때엔 포기하자. 쉼에도 도망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넥스트 스텝'과 '본격'을 배제한 채로 상상만 펼치는 것이 지금의 나한테 가장 잘 맞는 듯하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어떤 맥락에서 행복한지 실험을 통해 천천히 알아가고 다.




세상의 온갖 불행을 가져다가 나한테 붙여 놓고 갉아먹게 한 때가 있었다. 이제는 불행과 불안이 오면 '또 왔네.' 하고 눈치챌 정도까지는 회복된 것 같다. 매일이 다르지만 평균적으로는. 그래, 그저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본격적으로 말고 슬렁슬렁. 넥스트 스텝 말고 지금 당장 재밌게. 극복하지 말고 철퍼덕.


무기력은 어쩌면 극복하지 않으려 해야 극복되는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아니. '무기력을 극복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냥 팔과 다리를 동동 띄워놓고 흘러가길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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