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트북 속 논문의 오탈자를 눈이 빠지게 찾으면서 남편에게 토로했다. 남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음... 그래? 내 생각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남편의 말에 나는 희소식이라도 들은 듯 눈이 희번덕해져서 물었다.
"오? 그래? 어떻게 하면 될까?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따라와 봐."
남편은 자길 따라오라는 눈짓과 함께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재빨리 뒤따라 가는 내 가슴이 뛰었다. 우창한 덤불에 숨겨진 비밀의 화원에 초대라도 되는 것처럼 설렜다.
"바로 여기야."
남편은 안방 팬트리 앞에서 금세 멈췄다. 그런 후 거침없이 팬트리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 나는 보았다. 남편이 나를 초대한 곳은 비밀의 화원이 아니라 덤불처럼 울창한 옷 무덤이었다. 이사 온 지 어언 4개월째. 포장이사를 맡겼건만 포장을 풀다 말고 비닐봉지 째 옷을 숨겨놓고 가신 아저씨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이곳. 그 후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청정한 곳...
"넌 이미 대충 살고 있단다. 걱정하지 말렴."
"아, 정말! 이리 와!"
나는 짐짓 화내는 척했지만 솔직히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그러네... 나 대충대충 하고 있었네?' 대충 필요한 옷만 겨우 꺼내 놓고, 계절 바뀌면 또 보이는 옷 두세 개 봉지에서 꺼내 입고, 안 입는 옷들은 대충 말아서 안 보이게 두고. 그리고 이렇게 대충 해 놓고 사는 것에 전혀 문제의식이 없는 나.
남편의 의견은 이랬다. 나에게는 이미 대충 살고 있는 영역이 있고(많고) 그렇기 때문에 완벽주의가 (전혀) 아니라고. 완벽하려고 하는 특정 영역이 있긴 한데 전반적으로는 대충주의가 더 강한 것 같다고 했다.대충 사는 마음을 기리기 위해 안방 펜트리의 옷 무덤은 당분간 그대로 박제하기로 했다(계속 안 치우겠다는 얘기다).
일단 내가 대충 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렇담 대충 할 수 있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면 되니까. 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정말이지 대충 살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 방법을 몰랐지만 이제는 모든 일을 하기 직전에 저 거대한 옷무덤을 떠올리겠노라고 생각했다.
운동이라면 기겁을 하던 내가 재활 운동센터에 다닌 지 2개월이 지났다. 매주 세 번 꼬박꼬박 운동을 하는데, 평소에 운동과 담을 쌓고 지냈으니 그 과정이 평탄 할리 없었다. 운동코치님이 그날그날 몸상태에 맞는 처방 운동법을 알려주신 후 옆에서 정확한 동작으로 하는지 지켜보신다. 이 '지켜보시는 것' 때문에 정말 매번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내가 하는 동작은 매번 정석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 되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과하다 싶게 혼자서 열심히 바로잡았다. '히익... 잘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날은 옷무덤을 떠올렸다. 동작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오히려어깨 힘을 빼버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최선을 다한 후, 코치님께 이런 이런 부분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코치님이 하드코어한 동작은 바꿔주시기도 했다.
"자, 그럼 열 개만 하고 계세요." 코치님이 이렇게 말하고 잠시 자리를 비워 아무도 지켜보지 않을 때면, 이렇게 카운트를 하기도 했다. "하나, 둘, 셋, 넷, 여섯, 일고, 여덟, 열!" 두 개를 빼먹었지만 그래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충 하는 것이 아예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아마 꾹 참고 열 개를 다 채웠으면 다음날엔 센터에 나오기 싫었을지 모른다.
대충 하는 것의 묘미를 조금씩 느끼면서 인스타그램을 통해 대충 살기를 독려하기도 했다. 해시태그는 바로 #대충살자. 이미 많은 이들이 대충 살기에 동참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위트가 넘쳤다. 관자놀이로 이어폰을 듣고, 양말은 두짝 다 흰색이기만 하다면 짝이 맞는 걸로 쳤다. 나도 눈코입이 없는 대충 만든 병아리와 지옥에서 온 아기 상어 쿠키를 굽고도 행복한 어린이를 피드에 올리며 이 유쾌한 행렬에 동참했다. 참고로 눈코입 없는 병아리는 아이 소풍 도시락으로 보내기도 했다. 햐, 대충 산다는 마음은 행복 단추 같았다.
눈코입 생략된 병아리들과 지옥에서 온 아기상어
대충 산다는 말을 들으면 열심히 살지 않고 빈둥거리는 베짱이가 떠올랐었다. 그러나 경이롭게도 나는 대충 살기 시작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고 더 열심히 살게 되었다. 옷무덤을 직면하기 전이었다면 결코 용납하지 못했을 많은 불완전한 결과들을 포용하게 된 것이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일단 시작해버렸고, 대충 해버렸다. 옷무덤에 완벽주의 기질을 묻어버리고 온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나는 훌륭한 대충주의자가 되어갔다.
실제로도 '대충'의 사전적 의미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쓸만한 정도(국립국어원 우리말샘)'로,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완전하지 않아도, 적당히 해도 괜찮다는 것. 이것이 대충이라는 말이 나에게 준 포인트이다. 내가 대충 시작한 것들은지금까지 에세이쓰기, 브런치 작가합격, 블로그 시작, 동영상 편집, 노션 페이지 제작, 그림책과 책 읽기, 꾸준한 재활 운동, 데일리 드로잉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잘하려고 했다면 절대로 못 해냈을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충'과 '열심히'가 반대되는 단어가 아니라 이토록 서로를 보완해주는 단어라니! 완벽하게 하느라 시작조차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손해다. 힘 빼고 대충 하는 것이 이렇게나 즐겁다는 걸 지금이라도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