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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Jul 21. 2021

무용한 것들의 쓸모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게 없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 머릿속의 십장이 굵은 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자, 가자!” 그러자 일꾼들은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찾아가더니 일을 시작했다. 컨베이어 벨트가 윙윙 돌아가고 빈틈없이 각자 맡은 일을 했다. 그들은 서로 재잘거리지도 않았다. 창밖을 한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늘치의 일을 끝내야 했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배했다. 완벽한 테일러리즘이었다.

나는 매일 십장과 그 일꾼들처럼 살았다. 할 일 리스트를 만들고 동선을 짜며 24시간의 최대치를 뽑아내었다. 더 이상 나올 것 없는 치약 튜브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꾹꾹 짜내듯이. 시간이 부족할 때는 두 세배 뻥튀기를 하는 묘술을 부렸다.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하면 시간을 부풀릴 수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에 끼고 스터디를 하는 동시에 다른 한쪽 귀로는 템플 스테이 명상을 했다. 명상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죄책감을 스터디를 하면서 즉시 보완하는 기술이었다(린다, 절레절레).



공부밖에 모르던 아까운 시절이었다



무용한 것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돈이 안 되는 것을, 또 누군가는 실용성 없는 것을 무용한 것이라 여긴다. 내가 생각하는 무용한 것의 범위는 정말 방대했다. 공부 외의 거의 모든 것이 ‘무용한 것들’의 범주에 속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거칠고 담대하며 참으로 비인간적인 분류였다. ‘꽃 사기’는 어땠을까? 당연히 무용한 것이었다. 꽃 사는 시간과 돈 모두 아까웠다. 직접 요리하는 것도 무용했다. 일단 체력이 너무 많이 들었고, 음식을 만들고 정리하는 시간에 비해 먹는 시간이 너무 짧아 효율성이 제로였다. 침대 정리하기도 무용했다. 어차피 다시 그 상태 그대로 들어가 잘 것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책 읽기도 무용했다. 전공과 관련 없는 책 말이다. 전공책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상황에 소설이나 시를 읽는 것은 사치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졌다. 무용한 것으로 분류되는 즉시 그것은 죄수처럼 엄중하게 다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와의 대화 중 이런 말을 들었다. "너 공부 빼고 잘하는 거 없잖아." 이 말이 나오게 된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다. 앞뒤 씬들은 까맣게 변하고 가위로 잘라낸 듯 이 장면만 뇌리에 박혀 있다. 선배가 나를 놀리거나 무시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선한 눈빛의 그에게서 그저 흘러나온 말이었다. 선한 팩폭과 뼈 때리기.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 나를 정체화 오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을 적나라하게 듣다니. 그 후로도 비슷한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몇 번 더 들었다. 공부 빼고 잘하는 거 없냐고.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게 없나요?


이쯤이면 양심상 한 번은 곱씹어봐야 했다. '공부를 뺀 나'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내가 보내온 '시간'에 대해.

'나 뭐하면서 살았지?' 내게 물었다.
'공부랑 일 했지.' 십장이 대답했다.
'그거 빼고 다른 건, 없어?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달을 바라보는 시간, 친구에게 손편지를 쓰는 시간, 여행을 가거나 온전히 쉬는 시간 등은 아무리 짜내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잘하는 게 공부 말고 없나요?'라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라니. 여러 모양의 시간들이 뭉쳐지고 굳어져 인생의 길을 만드는 것이라면, 내 인생은 공장에서 찍어낸 똑같은 시간들의 집합소였다. 지금까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효율적인 덧셈의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 작은 것들을 모조리 놓치는 거대한 뺄셈의 삶이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드디어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성실한 일꾼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와아!" 함성을 지르며 공장 밖으로 뛰쳐나간 일꾼들은 제 몫의 삶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삶을. 한 일꾼은 조금 울퉁불퉁해도 단단한 여러 시간의 모양들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또 다른 일꾼은 별도 달도 있고 구불구불 물도 흐르고 나무도 자라는 그런 길을 가꾸었다. 그동안 못 먹었던 것을 요리해서 먹는 일꾼, 엉망진창이 된 집 안을 말끔하게 정돈하는 일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통나무처럼 누워 있는 일꾼도 있었다.

그들은 입 모아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도 공부 말고 다른 거 할래! 쓸데없고 재밌는 거!" 그들은 사실 공장 밖을 뛰쳐나가며 두려웠다. 잠시라도 멈추면 분명 엄청나게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괜찮아, 시간을 낭비해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무용한 것들을 탐색했고, 즐거웠고, 슬며시 눈을 떴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았다.


아니, 사실 일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했다. 두 뺨에 생기가 돌고 눈을 반짝거리며 웃었던 것이다. 이건 그 전의 삶에서 없던 것이었다. 쓸데없는 것을 함으로써 인생의 가치는 자꾸 더해지고 깊어졌다. '꼭 쓸데 있지 않아도 된다니!' 무용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꾼은,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가장 무용한 것이 가장 쓸모 있는 것이었다.



ⓒ cottonbro 출처 pexels.com
작업실에서 돌아와 밤이 되면, 나만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밤의 음악이 흘러나와요.

- '번거로움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Long-playing Music', 김이랑 <예쁜 쓰레기에 진심입니다>에서.




손목에 힘을 주어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고 작은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핸드드립 커피 완성. 커피 한 잔 만드는 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다니, 비효율적이고 무용하다. 테이블에 꽃 한 송이 꽂혀 있으면 더 무용한 시간이겠지만 아직 꽃 사는 단계까지는 못 갔다. 대신 매일 밤 마카 드로잉을 하고 있는데 정말 무용한 시간이지만 미치도록 즐겁다. 어느새 드로잉북에 채워진 25개의 그림이 사랑스럽다(커버 사진에도 올려두었다). 언젠가 LP로 음악도 꼭 들어봐야지. 드립 커피를 마시며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 든다. 박완서의 '소설'이다. 내가 소설을 다 읽다니, 생각하며 시계를 본다. 곧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그는 꽃과 모래를, 바람과 나무를 좋아한다. 무용한 것들만 좋아하는, 나의 스승인 셈이다. 오늘도 스승님과 최선을 다해 무용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하며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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