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워서갈비 Jun 18. 2021

뜨거운 화해 요청

마음아, 안녕.


있는 힘껏 쥐어짜도 한 방울의 힘조차 나오지 않는 내가 꼭 마른행주 같았다. 살면서 이런 적이 거의 없던 '열정 만랩'인 나는 매우 당황했다. 하루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가 또 하루는 무력감에 부르르 떨었다. 화가 나는 날도 있었고 그러다 갑자기 용기가 차오르기도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번아웃인가? 아직 '번(burn)'해야 할 게 많은데."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슬럼프 비슷한 것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김연아 선수의 움짤 캡처 화면을 보았다. 누군가 그녀에게 묻는다. 무슨 생각을 하며 연습하냐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이 간단한 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금세 명랑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래, 그냥 하는 거지 뭔 생각이야... 아자자자! 파이팅!!!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번에 감지된 기운은 미묘하게 달랐다. 문제는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 주위에 적극적으로 나의 상태를 알렸다. 다들 내가 너무 달려와서 그러니 이참에 좀 쉬어가라며 위로했다. 그래야 다시 힘이 차오른다고. '힘이 차오르기 위한 전제로서의 쉼'을 권유받던 순간, 나는 알았다. 내 마음이 완전하게 꺼진 모닥불 같다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에 이제 힘이 좀 그만 차오르면 한다는 것을.




번아웃을 계기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다. 생경했다. 아아, 너도 거기 있었구나, 싶었다. 마음의 멱살을 잡듯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부터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내가 나와 친하지 않아서 어떠한 답도 들을 수 없었다. 마음이 내게서 등을 돌린 느낌이었다. 오히려 마음의 부침 현상이 롤러코스터를 탄 양, 회오리바람을 만난 양 더욱 심해져갔다.


이렇게 갑자기 마음이 존재감을 드러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알고 싶어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나와 나 사이의 대화였다. 몇 날 며칠, 일주일 이주일 한 달. 글을 쓰고 또 썼다. 내가 뱉어낸 글은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단단한 겉포장을 가진 척했지만 갓 부화한 병아리보다도 약했다.



쓰는 동시에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었다. 닥치는 대로 듣고 읽었다. 나와 결이 다른 삶들의 이야기 혹은 나와 맞닿는 지점들의 이야기. 이거 아니면 죽는 줄 알고 달려온 내게 사람들은 무수한 가능성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책을 펼쳐 놓고 하루 종일 문장들을 더듬는 것도 나의 생존법이었다. 뜬금없는 소설 속 주인공의 한마디에 위로받곤 했다.


영화에서처럼 꽝! 하고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글을 쓰는 과정에서 몇십 년 묵은 마음들이 밖으로 배출되어 갔다. 스쳐가는 이야기들이 커다란 날개로 마음 위를 한 번씩 훑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날들이 쌓이자 여러 개의 세계로 시야가 확장되었다. 자연스레 하나의 세계에서의 심적인 괴로움은 상대적으로 작아져 갔다.



상담가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변곡점이 와요. 이걸 계기로 지금처럼 살 수도,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요, 마음과 생각이 싸우면 늘, 정말이지 항상, 마음이 이깁니다. 그걸 찾아 따라가 보세요."

심리상담 이후 온전히 마음을 위해서만 따로 '노력'이란 걸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불안들을 마음에서 떼어내는 장면을 상상한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시간을 만든다. 짐볼에 앉아 골반을 교정하고 고양이 밥을 주고 빨래를 돌리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그러고 나면 마음이 생각의 틈을 비집고 버섯처럼 조금 자라 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아이와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이를, 아이의 머리칼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만져본다. 한 치의 생각이 들어오려 하면 단칼에 쳐내는 상상을 한다. 그냥 몽글거림, 온유함, 사랑스러움 같은 것들을 '느껴보려' 애쓴다. 꼭 뭔가를 해야 할 때는 나를 갈아 넣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철저히 감독한다. 갈아 넣을 조짐이 보이면 재빨리 일을 접는다. 글을 쓰다 노트북을 콱 덮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투두 리스트(to-do list)폐기한다. 중요한 일을 일부러 패스한다.


이렇게 사는데별다른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도 '돌보아야' 하는 건데 왜 아무것도 안 했을까. 결국 못 참고 터져 나와 소용돌이치는 얘한테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화만 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그렇게 속으로 자꾸 뜨거운 화해 요청을 했다.





애써 뭘 하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흙탕물의 모래가 가라앉으면 맑은 물속 돌들이 보이겠지.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뿌연 물이 사라지길 기다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시간을 선물 받은 것만 같다. 쓰고 듣고 읽고 했던 일련의 과정들이 스쳐간다. 많은 조력자, 조력책, 조력문장을 만났다. 그 이야기들을 온전히 받아들여 마음을 돌본 나 자신도 어쩌면 든든한 조력자일 것이다. 멋진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지으려 했던 생각을 버리기로 한다. 대신 버섯같이 빼꼼 자라난 마음을 데려와 본다.

"마음아, 안녕. 잘 지내보자. 날 좋은 곳으로 데려다줘. 나도 조력자가 돼볼게."

언젠가 화해가 성공하면 우리는 행복해질 일만 남은 것이리라.

이전 03화 저글링하다 모두 놓쳐버린 세 가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