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워서갈비 May 24. 2021

저글링하다 모두 놓쳐버린 세 가지

육아, 공부, 딴짓



한겨울 내내 허리를 관통했던 통증이 아주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상쾌하고 안온한 기운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허리 굽혀 양말을 신고 세수를 하는 평범한 일상. 새롭게 주어진 풍경에 어쩔 줄을 몰랐다. 맥주를 매일 마실 수 있다니.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흘러넘쳤다. 로고침 한 것처럼 가뿐했다.


부릉부릉, 바로 다시 시동을 걸었다. 완전히 몸이 좋아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빨리 뭔가 해야만 했다.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아야지. 나는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두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비장하게 섰다. 윽고 세 개의 공을 손에 쥔 채 힘찬 저글링을 시작했다.


절대로 공을 떨어뜨리지 말아야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뭐든 해내자.






육아의 세계

엄마가 아팠던 시간은 아이에게 상처를 남겼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엄마 노릇을 하리라 별렀다. 어떻게든 엄마 부재의 시간을 보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육아 자체가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이와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는 순간, 그림책 속 도깨비를 흉내 내는 과장된 내 목소리에 아이가 깔깔대는 저녁의 온기. 이런 보통의 육아 속에서 어 올리는 반짝임들소중하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했다. 그보다는 좋은 그림책을 배달해주고 영양이 완벽한 식단을 제공하는 것에 집착했다. 내 시선은 '육아를 열심히 하는 나'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잠든 밤이 되면 슬며시 열등감이 들었다. 완벽한 육아를 하지 못했다며 질책했다. 육아에 자신이 없어지다 보니 두 눈동자 자꾸 흔들다.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해로운 일이었다.


공부의 세계

심호흡을 하고 노트북을 켰다. 반가움과 두려움이 정확히 반씩 들어찬 마음으로 쓰다 만 프로포절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고대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을 심폐소생술로 살려내고 싶었다. 살려내고 싶고, 살려내고 싶고, 살려내고 싶은 마음이 수위를 넘어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 후 매일 스타벅스에서 논문을 붙들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맹렬하게 일에 달려들었던 지난날과 달리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하고 싶은데 하고 싶지 않은 알 수 없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완벽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너무 조급해하고 있는 걸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몸보다 회복이 더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느긋하고 단단해질 시간이 좀 더 필요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에 눈을 돌려야 했다. 이를테면 ‘딴짓’ 같은.


딴짓의 세계

딴짓이라고는 별로 할 줄 아는  없었던 내 유일한 취미는 SNS 탐방이었다. 꾸준하게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보면 경외감이 들었다. 뭘 먹고 저렇게 창의적인 건지도 물론 궁금했지만 그보다 ‘꾸준함’이라는 키워드가 더 대단해 보였다. 어느새 경외의 마음 한 켠에 슬며시 ‘닮고 싶음’이 자리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에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내가 선 자리를 옮기면 어떨까. 막연한 궁금증에 편집 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써서 SNS에 공유했다. 재미로 한 건데도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긴장됐다. 하루 종일 조회수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댓글이 없으면 시무룩해졌다. 그런 상태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그러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지쳐서 나는 더 이상 다른 것들을 만들 수가 없었다. 잘하지 않아도 뭐라 할 이 한 명 없는데도 습관처럼 지나치게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는 마냥 즐기는 것을 그토록 잘 못했다.






“일 말고 잘하는 게 없어서 이지은은 잘하는 게 없고”, “내가 중독된 건 일이 주는 '자극적임'이었구나. 이게 과연 건강한 '열심'이었나?”

- <유퀴즈 100회> 아이유 편


어느 인터뷰 속 아이유의 말이 내 마음에 그렇게나 와서 닿았다. 나 역시 '중독된 열심'에 늘 취해 있었기에.




갓 태어난 생명체처럼 의욕이 넘쳐나던 그때의 나는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세 가지 세계를 저글링하고 있었다. 어느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플레이에 임했다. 러나 육아, 논문, 딴짓 모두를 ‘일’과 연결시킨 것이 패착이었다. 육아를 할 거면 전업주부가 되어 제대로, 논문을 쓸 거면 프로페셔널하게, 딴짓을 할 거면 생산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갈아 넣고 쥐어짜 내는 익숙한 감각을 좇느라 아무것도 즐기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 개의 공이 일제히 와장창 떨어졌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완벽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다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멈춰버리자."  누구도 완벽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겨눈 차가운 칼날 끝에 나는 쪼그라들었다. 세 가지 세계 모두가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무력한 완벽주의’의 단상이었다.


이전 02화 허리디스크가 내 귀에 속삭인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