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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Sep 26. 2021

하마터면 치킨이 될 뻔했다

그냥 생닭으로 살아도 괜찮아



기분 좋은 날씨. 에코백 하나 걸쳐 매고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들여다본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핸드폰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내 주위의 풍경들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채로 버튼을 눌러 지도교수님의 전화를 받았다. 어색한 웃음, 근황에 관한 이야기. 6개월 만에 먼저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민망함과 고마움이 감돌았다. 그러나 더 큰 감정은 역시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 질문이 나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논문은, 어떻게 되어가?



힘주어 또박또박 끊은 문장. 이 문장은 나에게 다시 한번 어떤 마음인지 묻고 있었다. 교수님의 입을 빌려, 내가 나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논문 쓸 거야, 말 거야?



건강상 문제라는 핑계와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린 전화가 끝났다. 이제 어느 하나를 뾰족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에 극심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갑자기 나라는 인간이 벼랑 끝에서 납작해졌다. 와들와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당장 달려가 논문을 끝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나는 그날부터 논문을 쓰기 위한 마음 예열을 시작했고, 다음날부터 논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참 웃겼다. 며칠 전만 해도 나를 괴롭게 하는 논문으로부터 도망가려 하고 있었으면서. 온갖 다짐을 하더니. 10년 동안 해온 버릇이 어디 가냐, 싶었다.





문제는 다시 논문을 쓰기 시작한 다음날부터였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절망감이 나를 압도했다. 부상을 당한 선수가 다시 끝도 보이지 않는 레이스에 선 기분. 절뚝대면서 어찌어찌 달려야 하는 상황. 두렵고 불안했다. 그 레이스에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데, 이게 도대체 하루아침에 어떻게 된 일이지.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웃지 못했다. 자꾸 누군가가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완벽하게 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어도 나는 달래지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나를 많이 속여온 탓일까. 이번에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 버티는 느낌이 들었다. 교묘하게 생닭을 속여 지금껏 무수히 많이 기름통에 집어넣은 탓이었다. 마음이 더 이상은 속지 않았다.



이미 레이스에서 도망친 행복을 맛본 나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를 더 이상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만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항복 선언을 했다. 이번에는 채찍질하는 마음이, 지고 말았다. 대충 살아보고 무용한 것들도 해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 보니 이 쪽이 훨씬 좋았다. 힘든 순간들에 나를 지탱해준 것은 성공에 대한 갈망이 아닌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이었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행복을 맛보고 싶었다.


논문과의 작별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논문에 대한 미련이 또 조금 털려 나갔다. 논문과 비교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그 전보다 열 배는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일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었다. 몰랐으면 몰랐지, 이미 좋아하는 것을 알아버린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교수님의 질문 한 번에 스러지다니. 나를 찾겠다는 나의 다짐은 정말 연약하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나선형으로 돌고 있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점차 좋은 방향으로 올라가고 있는 나선형의 삶. 제자리로 돌아온 듯 보여도 그건 조금 더 단단해지기 위한 뒷걸음질이었을 뿐이었다. 뒤로 돌아간 만큼 더 치고 나갈 힘이 차올랐다. 실제로는 나아가고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나는 결코 일직선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막연함에서 선명함으로, 물렁함에서 단단함으로. 그렇게 마음은 굳어졌다 녹았다 하면서 강해질 것이다. 넘치면 덜어내고, 부족하면 채워 넣으면 된다. 나에게 질문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상태가 지속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채울 것인지를 잘 정하는 것이다.


성공과 완벽이 지향점인 세계에서는 사실 계속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프레임을 바꾸려 한다. 나에게는 무엇이 성공인지. 나는 어떤 맥락에서 행복한지. 인기 많은 치킨이 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날것의 나, 생닭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세상은 그런 나를 보고 너무 쉽게 '나태해졌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괜찮다. 눈을 떴을 때 절망감으로 뒤덮이는 삶, 마음이 지옥인 삶에서 도망치는 것은 나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지런한 것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아니까. 다 괜찮다.





혹시 나처럼 번아웃에 덫에 걸린 사람이 있을까.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완벽주의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알면서도 떨쳐낼 용기가 없어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지 않을까. 그럼 혹시 내 이야기가 도움이, 조금의 위로가 될 수도 있지는 않을까. 울고 도망치고 부정하고 무기력하고 포기하는 이런 정신없는 이야기라도.

그래서 나를 위해 시작한 이 글을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엮어내고 싶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이야기에 그날의 마음이 죽고 살고 했던 때도 있으니까. 단 한 명이라도 내 이야기에 '이런 사람도 있네' 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 그걸로 족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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