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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Sep 24. 2021

열심히 노력하지 않기 위한 노력

다행이다,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만날 수 있어서


'와, 구름이 너무 예뻐!'


올 가을, 깨끗하고 청명한 공기에 하늘은 맑고 구름이 아름다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운전하다가 문득 구름을 발견하곤 적당한 곳에 차를 멈추어 세웠다. 휙휙 지나가면서 볼 때와는 다르게 수채화처럼 엷게 퍼져 있는 구름의 형태나 색감까지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문득 구름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차까지 멈추어 세우면서 구름을 보기 시작한 걸까. 확실히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앞만 보고 고속도로를 달려가던 차였다면 지금은 울퉁불퉁해서 천천히 달려야 하는 시골길 위의 차다.


먼지를 뒤집어썼어도 지금의 차가 더 마음에 든다면
나는 잘 가고 있는 거겠지.



분명 내가 성취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잘 모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사실 것을 부정하는 일은 괴로웠다. 지금껏 내가 살아내 온 세상 전체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온 가치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고, 온갖 생각의 파편들이 찢어지고 흩어져 날렸다. 그것들은 미세하게 살갗을 파고들면서 나를 찔러대기도 했다.


하지만 멈춤그 시간이,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살면서 가장 귀중한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여러 책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박혜윤의 <숲속의 자본주의자>라는 책은 일종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어, 이렇게 살아도 괜찮네.'


해 오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며 삶의 골수를 맛보는 저자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생을 다할 때, 저자처럼 삶을 음미해 보지 않은 것을 처절하게 후회할 것 같았다. 죽을 때 단순히 학위를 마치고 마치지 않고의 문제를 생각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숲속의 집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고. (근데 갈 수 있으면 가고 싶기도 하고.)



숲속의 자본주의자는 어떤 삶을 이야기하나




삶의 골수를 맛보는 게 뭔데?


나도 내 삶의 골수를 맛보고 싶었다. 나만의 의미와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나다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꽤나 공이 드는 작업이다. 그런 삶의 독특성, 의미, 재미를 주목하고 찾아낼 사람은 우주에 나 한 사람밖에 없다(6p).

어디에 있든, 어떤 방식으로 살든,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음미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모두가 자신의 일상이 갖고 있는 위대함을 남김없이 캐내어봤으면 했다(7p).



원래는 소로의 <월든>까지 읽고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내 삶의 골수를 맛본다'는 이야기는 월든이 먼저 시작한 이야기이니까. 사실 그 골수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에 완전히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삶의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는다고 하니, 워딩 그대로 '죽을힘을 짜내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조언에 쓰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저자의 해석이 마음에 든다. 세상에서 말하는 최선이 아닌, 나를 찾는 데 안간힘을 쓴다는 의미의 골수.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맥락이 무엇인지에 '초'집중하는 노력들. 그걸 아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세심하게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내가 나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지금에야 나는 새롭게 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는 기분이다.




단 하나의 성공한 삶, 그런 거 없다


누구든 한 번의 인생을 사는데,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의 선택을 쌓아가는 일이다. 선택이란 오로지 하나를 택하는 것인데 자연히 버려진 무한히 많은 가능성이 생긴다. 가지 않은 길 말이다. 현명한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무수한 가능성 중 단 하나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보지 않은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그들은 할 말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 인생의 성공과 완벽에 대한 기준을 버리는 것이다. 인생은 그저 사는 것이지 '잘' 살아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아무도 '잘' 살 수가 없다(106).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성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는 포기하고 도망친 것에 대한 '정신승리'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정신승리가 나쁜 것일까? 자신에 대한 열패감을 딛고 작은 승리감을 끊임없이 갖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치기 어린 반항이 아니다. 누구도 내 삶과 완전히 똑같은 삶은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 삶에 대해서는 오직 나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한 마디로 납작하게 평가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납작한 한마디에는 삶의 이런저런 과정과 그럴만한 이유, 진심 같은 것들이 모두 거세되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대수롭지 않게


저자가 전해주는 특별한 생각들은 단단한 논리를 동반한다. 그래서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내내 끄덕이게 된다. 어떤 부분들은 마치 논문 같기도 하다. 나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글을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저자의 논리에 동조하고 말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힘인 자존감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167p)."와 같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여기저기서 자존감이 매우 중요하다고, 자존감을 지키고 키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자존감이 대수롭지 않다니? 그러나 더 읽어 내려가 보자.



내가 자존감을 믿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긍정할 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 나는 그 대신 나를 존중해주고 무조건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는다(167p).



주위 사람들이 해주는 든든한 말들이 있으니,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 여기는 자존감에는 그다지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이 문장나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항상 남편에게 나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곤 하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묻는 이유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다. 그 말에 기대어 단단히 서고 싶어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너무 의존적인 인간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저자의 문장을 읽어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나를 지지하고 긍정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 말을 믿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음 근데 계속 질문을 듣게 되는 상대방에게는 나쁠지 어떨지 모르겠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자


골수까지 음미하는 삶을 찾아 나서는 부분도 좋고, 자존감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부분도 좋지만 이 책의 진수는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삶을 외치고 그걸 실제로 보여준다는 거다. 저자는 어떤 일에도 끝까지 불태워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억울했다. 번아웃이 오기 전에 이 책을 알았더라면. 그전에 이 문장을 읽었더라면! 그럼 나는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음,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그땐 이 문장을 보고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내가 꼭 필요한 순간 이 문장이 내게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어떤 일에도 100퍼센트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 회사에 다닐 때도, 박사 공부를 할 때도, 갑자기 그만두어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대충 한다. 다음에 할 일, 내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나 돈이 항상 남아 있기를 바란다. [...] 최선을 다한 끝에 지쳐버려서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도 싫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놓치기도 싫다. 그리고 어떤 일이고 지겨워지거나 멈추고 싶을 때 언제라도 그럴 수 있는 자유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262p).

인생에서 내가 꾸준히 노력하는 건 바로 열심히 노력하지 '않기'이다. 그럼 가만히 살면 될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경계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어렵다. [...] 이럴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아, 안 돼, 이렇게 열심히 하면 안 되지' 하며 멈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266p).



요즘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야기들과 싱크로율 99.999%로 유사해서 놀랐다.


열심히 살지 않으려면 따로 '노력'을 해야 한다.
대충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 혼자 끙끙거렸던 생각인데,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만나면서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겨내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세상. 나 혼자 어디 가서 이런 소리 하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미 그런 소릴 한 사람이 있다니. 든든한 내 편이 생긴 느낌이다.


요즘 실제로도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나는 저자에 비하면 애송이 수준이다. 저자의 열심히 하지 않기는 삶 그체에 면면히 녹여져 있다. 일단 숲 속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블랙베리를 따고 빵을 구울 때 절대 열심히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블랙베리는"심심할 때까지만 딴다. 재미있다고 느껴질 때까지만(22p)." 빵을 굽고 팔 때는 이 일이 "창조적인 기쁨, 놀이의 즐거움이 되는 선에서" 멈추기 위해 노력한다(17p). 말은 쉽지만 블랙베리를 한 바구니 딸 수 있다면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할 것이다. 냉동실에 저장하면 되니까. 달콤한 스콘이 잘 팔리면 그걸 더 많이 만들어서 수입을 늘릴 구상을 하겠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통밀 빵 만들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면서.


그러니까,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재미있게 이 순간에 뭔가 하는 것, 그뿐이다. 정말 부럽다. 나는 자꾸 넥스트 스텝, '그래서 이걸로 뭘 할 건데?'를 생각하면서 가장 즐거울 수 있는 순간을 없애버리곤 하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이 문장을 만날 수 있어서.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어떤 일을 가장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순간들을 느끼면 충분하다. 그것이 바뀌어도, 오래 지속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우리의 일상은 인내하며 생산하는 것과 소비하는 즐거움으로 나뉘지 않는다(21p)." 나도 저자처럼 "생산을 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추구할 것이다(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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