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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규 PHILIP Mar 08. 2022

[H갤러리] 마르크 샤갈 · Interior II

Marc Chagall (1887 러시아 제국 - 1985 프랑스)

1911. Interior II.



3월 컬렉션. Marc Chagall(1887 러시아 제국 현 벨라루스 ~ 1985, 프랑스 니스). 1911년 작품



애초에 무리였던 것일까. 1911년 샤갈의 작품에서 어떤 전략적 인사이트를 얻는 일 말이다. 전략은 혁신을 통해 발전을 거듭한다. 해서 샤갈의 화풍이 180도 바뀐 1911년 작품을 좀 면밀하게 볼 계획이었다. 한데 시작과 동시에 좌절감이 들어왔다. 이 일을 어쩐다. 그냥 여기서 그만둘까? 아니 좀 더 파헤쳐 본 후에 결정할까? 고민의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하지. 어쩌면 19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리 행 기차에 오른 샤갈도 가난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파리 생활을 걱정하며 덜컹거리는 마음을 나흘 동안 기차 안에서 붙잡느라 애썼을 것이다. 벨라가 마음의 중심에 없었다면 샤갈은 어느 외딴 역에서 잠시 정차 중인 기차 밖으로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샤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파리의 한 아파트식 공동 주택에서 첫 화실을 열고 각오를 다진 샤갈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폴 뒤랑 뤼엘 갤러리에서 인상파 작품을 보고, 베른하임 미술관에서 고갱과 고흐 작품을, 가을에 열린 살롱 전에서 마티스 작품을 감상했다. 그리고 찾아 간 루브르 미술관에서 샤갈은 이런 말을 남겼다. 


"루브르에서 나는 불확실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1911년 Interior II는 샤갈이 파리 시절 접한 입체파 영향을 받은 첫 작품이다. 인고 발터와 라이거 메츠너가 공저한 'Marc Chall'(마로니에북스, 2005)에서 두 저자는 '남자에게 달려드는 여자의 치마와 탁자 모서리의 각진 모양에서 입체주의적 표현양식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http://www.artnet.com/artists/marc-chagall/interior-ii-jHGZMJslZ0dIYKnQq7_osA2 , artnet 사이트에서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한데 이 작품은 당시 포르노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에 이 같은 해석이 가능했던 것은 작품의 모티브를 일직선으로 배치(피카소와 브라크 작품) 하지 않고, 원형으로 배열하는 단순한 구성상 변화를 줬기 때문이고, 작품 속 이야기가 선명했기 때문이다. 샤갈의 상상력이 현존하던 입체파 표현 기법을 토대로 불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병렬 배치를 원형 배치로 재구성한 정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나의 마을 I and the Village', 샤갈을 일약 스타로 만든 작품이다. 불확실성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샤갈의 말이 비로소 이해를 했다.


입체파 표현 방식에서 인사이트를 얻은 샤갈은 당시 가난했다고 한다. 오이도 한 조각밖에 살 수 없었고, 청어 한 마리를 사면 네 등분을 해서 나흘을 버틸 정도였다. 생활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캔버스조차 재활용했다. 한데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샤갈에게도 씌울 수 있는 고깔 모자일까. 재활용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릴수록 빛과 어둠을 대비하는 솜씨가 나날이 발전했다. 인고 발터와 라이거 메츠너는 그 자체가 샤갈의 특별한 표현 기법이 되었다고 말했다. 한데 놀라운 일은 이러한 표현 방법이 입체주의자 특유의 화법이었다는 것이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탄생의 신비를 샤갈은 체험한 것이다. 파리 활동 편의를 위해 세갈 모슈 본명 대신 마르크 샤갈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부르도록 한 일의 첫 성과처럼 보였다. 생활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붓을 쥔 자의 일념이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이것을 전략적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다. 샤갈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내적 세계가 견고한 예술가 이기 때문이다. 한데 전략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실마리는 있다. 입체파 영향은 수렴하되 모방은 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파리라는 외적 환경의 장점을 잘 헤아렸고 그 장점을 자신을 옥죄고 있던 불확실한 사슬을 끊는 데 지렛대로 사용한 점이다. 또한 가난이라는 내적 환경을 탓하기보다 잊는 것을 택했고, 캔버스를 자기 세상 삼아 마음껏 유영을 한 것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갈망을 샤갈은 혁신의 불쏘시개로 쓴 것이다. 여기에 벨라를 향한 욕망의 담금질도 한몫을 했다(나의 약혼자에게 바침 To My Betrothed,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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