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UNY] 초고(礎稿)를 탐하다

lain Faulkner.

by 한봉규 PHILIP
글탐.초고탐.lainFaulkner.jpg Horizon


초고(礎稿)를 마친 날 그 사람이 내 안부를 물어 왔다. 삼 년 동안 시치미를 뚝 떼고 있던 그였다. 나는 왜일까 의심하지 않았다. 서너 시간은 족히 빠져 있어도 좋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리 좋으냐고, 벨도 없느냐고 할지언정 그 사람이 보낸 글은 바다였다. 파도 소리가 났고, 수평선은 고요했다. 게다가 거친 숨을 몰아쳤던 달무리 진 날도 떠올랐다. ‘잊지 못할 날이 되었네~’라는 마지막 문장을 몇 번씩 독백 치다 하마터면 절벽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리 좋은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초여름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었다. 더워서 며칠 미루고, 직업적 글쓰기가 빨갛게 여물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 농땡이도 부렸다. 좀처럼 글발이 나지 않을 때는 필사하며 버텼다. 여기가 한계인가 읊조리는 순간 신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 글은 마쳐야 한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최선을 다하자는 말을 잊은 것은 아닐 테지. 노랑진 사정을 모르지 않다. 하지만 지난날 네 모습으론 새 인연은 어림없다. 네 아량이 커진 소식 전할 길은 글을 마저 쓰는 일이다. 부쩍 자란 네 소양을 글에 담아라. 기뻐할 것이다. 고마워할 것이다. 홀연히 네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일어나라!'

새 문장을 시작할 때, 신의 음성을 그 사람 목소리 삼았다. 첫 말이 기개가 없을 때는 내 귓불을 잡아끄는 듯싶었다. 창 틈 불빛을 길라잡이 삼아 첩첩산중 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초고를 그렇게 마친 날,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좋은 날 글 다 쓴 걸 축하한다라는 것이다. 그날 나는 온종일 그 사람이 있는 그 바다를 떠 날 수 없었다.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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