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은하수510

[은하수510] 주격 조사

Creative by 정성준 작가

by 한봉규 PHILIP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薄暮)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정성준 작가. 20200518 페이스북 포스팅 작품




김훈 선생이 쓴 '칼의 노래' 첫 문단이다. 몇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읽을수록 생생하다.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라고 혼잣말로 운을 떼자 '그분은 천재였지!'라는 답변이 어색하지 않다. 내 눈은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로 옮겨갔다.

'칼의 노래' 첫 문장을 '꽃이 피었다'로 할 것인지 '꽃은 피었다'로 할 것인지를 두고 선생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문장에 대한 지독한 집착 역시 천재성을 드러내는 일인가. 선생은 왜 고민했을까. 무엇을 두고 애타하셨을까.

납득할 만한 구실을 찾지 못한 채 잠수교 위에 하얀 달이 떴다. 밤 새 '~이'와 '~은'을 두고 쓴 내 원고를 이제 그만 비오리가 물고 가 줬으면도 싶다. 한강에 머릴 처박고 싶을 지경이다하면서도 원고 마감이 있는 것도, 독촉하는 이가 있는 것도, 독자라곤 나뿐인데 희한한 아침을 만들지는 말자 나를 다독인다.

생각은 그렇지만 몸뚱아리 감각은 이대로 아침을 맞이할 것인지 달과 함께 퇴장할 것인지를 쉴 새 없이 하품으로 신호를 낸다. 눈은 또 왜케 감기는 것인지. 하지만 서래섬을 배회하는 고양이처럼 두 조사의 쓰임이 기억 속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문맥의 수문장'으로 불리는 조사는 '말의 뜻'을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품사다. '은·는·이·가'가 대표적이다. 조사가 바르지 못하면 문장과 문장은 파죽지세로 무너진다. 뜻이 명토박('꼭 집어 가리키다'는 뜻)지 못해 쓰는 것도 읽는 것도 고역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김훈 선생의 '고심'이 무엇 때문인 지 알 것 같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첫 문장은 '버려진 섬에 꽃이 필 줄 몰랐다'라는 의미다. '섬이 버려질 만큼 참혹한 전쟁이어서 꽃이 필 줄 몰랐는데, 꽃이 피어나다니!' 참혹함을 뚫어 낸 생명력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한 것이다. 조사 '~이'의 이러한 말맛은 객관적인 상황을 주관적 심경으로 이어가게 한다. 이 심경을 이어 받는 조사가 '~은'이다. '~이'가 길을 트면 문맥 다리 역할을 '~은'이 하는 셈이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두 조사 쓰임이 적확하니 문장들은 읽는 족족 소리를 낸다. 소리는 공간을 뚫고 시간을 돌린다. 소멸한 섬들이 영혼을 살리는 춤을 추고, 떠오른 꽃은 심장을 녹이는 칼의 노래를 부르는 듯 싶다. 아, 이런 비경을 글로 쓸 수 있구나. 정처 없이 떠 돌던 내 감정이 정화하고 황홀하다.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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