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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규 PHILIP Jun 09. 2020

[삼삼한] 에어서큘레이터

Creative by Chon Byung-Hyun,ssakgong

전병현 작가. Blossom oil on canvas




어떤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하는 건 너무 더운 날이었고, 가슴이 답답한 날이었고, 수정하고 있는 글은 내가 읽어도 재미없었다. 강의 자료가 산처럼 쌓인 것을 치우는 일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대충 그렇다고 하자.


하루는 원고 자료를 버렸고, 다른 날은 지난 수업 자료를 버렸다. 또 어떤 날은 찬장을 열었다. 반찬통이 몸집대로 줄 서 있다. 쓰레기 봉지 입을 큼지막하게 열고 나는 눈을 감았다. 망설임 1도 없이 단번에 쓸어 담았다. 텅 빈 찬장을 보니 홀가분하다. 얽히고설킨 내 마음은 개운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꽤 많은 짐을 걷었다.


폭염주의보 소식을 들은 날 아침 에어서큘레이터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은 이놈을 버려야겠군.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있다는 일이 이리 반가운가 싶었다. 동사무소에 들려 버리는 방법을 알았고, 폐가전 제품 처리를 도맡아 한다는 업체에 5천 원을 입금하니 인기척 느낄 틈도 없이 가져갔다.


실내 공기를 순환시키는 일을 2013년부터 한 녀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시원할 것 같은 마음에 그 녀석 만한 공간이 생겼다. 공기가 당장 무디고 더디고 무거운 느낌이다. 그놈 있을 때는 몰랐던 낌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는 말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물건이 이럴진대 사람 들었던 자리가 빠지면 그 자리를 보는 일은 고역인 것도 새삼스럽다. 있을 때 잘 하라는 연예 1법칙을 일깨우고 떠난 에어서큘레이터. 공기를 순환시키고 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늘 환기시키지 않으면 사랑은 고인다는 사실을. 물건이든 사람이든 떠난 후에야 아는 이런 에피소드를 매년 반복하다니, 이런 망할.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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