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by Richard Burlet(1957 ~ )
그이가 나를 이끌어 간 곳에는 꽃 무더기 천지였다. 험한 비탈길을 무슨 힘으로 기어올라 꽃밭을 이뤘는지는 알 수 없다. 코스모스·꽃잔디·양귀비·패랭이꽃이 저마다의 맵시를 색으로 향기로 나를 아찔하게 했다. 실은 꽃동산 아래쪽에 쪼그려 앉아 꽃잎을 쓰다듬는 그 사람이 더 아름다웠다. 그이에게로 넘어지면 꽃 이불이 따로 없겠다도 싶었다. 그날 그 사람은 내게 인연을 보내왔다.
살아온 시간이 첩첩산중을 이뤄 가는 때이다 보니 인연은 크기와 무관하게 물과 같다고 했다. 잡는들 뿌리친들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무는 일도 떠나는 일도 모두 야속하진 않다고도 했다. 그럼 나는 '물이 되겠다'라고 답했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휩쓸려 섬으로 흘러 갈지라도 다시 산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목이 마를 때는 들이키는 물이 되고, 손을 씻을 양이면 당신의 손가락 마디마디 딱지처럼 붙어 있는 못난 추억을 떼어내는 물이 되겠다"라고 했다. 그것이 내 '인연의 물'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
꽃무더기 위에서 대보름달이 둥실둥실 일렁이는 오늘, 문득 그 사람의 답이 궁금했다. 아마 넘치진 않았을 것이고, 부족하지도 않았을 테지. 채근하여 답을 내놓으라고 하면, "여기 꽃 천지를 우리 엄마가 보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수사(修辭)는 늘 그랬으니까.
"유난히 살살 피고 지는 꽃의 이름이 예쁜 것을 보면, 고단한 삶의 유이한 기쁨은 인연 짓는 일이더구나!"라며, 꽃무더기 비탈을 쓰다듬 듯 내려온 달빛이 그 사람 몫의 답을 내고는 나를 감싸 안았다.
"사람은 인연을 지을 때마다 꽃을 피운다더구나. 어느 꽃은 피다지고 어느 꽃은 천 길 물속을 헤아린 다음에야 꽃봉오리를 여는 것을 보면, 인연은 시절이 따로 있는가도 싶고, 물길을 내는 일 같기도 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소홀히 다룰 일은 아니더구나. 돌아서도 한 번은 돌아 봐 주고 손은 흔들어 주어라! 독한 마음이 들어 치가 떨린다고 짓밟지는 말아라! 볕이 좋고 인심이 후한 날을 골라 가여워는 해 주는 일이 물처럼 편히 흐르는 것을 좋은 인연이라 말한 것은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내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뺨이 오늘따라 이리 환하고 아름다운 것이 너의 인연 덕을 내가 톡톡히 보는가 싶구나! 일부러 예까지 와 안부 물어주고, 그리워해 주는 너의 인연은 참 고맙구나, 그만하면 이제 됐다!" 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