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기하다. 이 책을 분명 읽었는데도 참 새로웠다. 내게 그렇게 죽음에 대한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30대였다. 두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해 보지 못한 경제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인지 이반 알리치의 성공이 내심 부러웠다. 딱 내가 원했던 그 삶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이고 그가 남성일뿐, 나 또한 법학도로서 입신양명을 꿈꿨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와 관계없는 어떤 일로 인해 공부 동력을 잃어버려 조금 방황을 했다. 마치 이반의 법학교를 적응하지 못한 다른 형제들처럼 말이다. 그의 나름 전문직이자 상류층으로서의 뽐냄에 대한 내면에 공감했고, 그의 허무한 죽음에 도대체 작가는 뭘 말하는 걸까 아리송했던 기억이 난다.
이 소설은 너무나 평범하다. 평범한 공무원의 삶과 죽음을 그리고 있다. 정말 옆 집 아저씨가, 친척이 저런 삶을 살았다고 해도 너무 무난한 그런 삶이다. 그럼에도 톨스토이가 가진 글을 쓰는 재능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그 평범한 삶 속에 넣어 놓은 강렬한 메타포 때문인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명쾌하게 끝맺음이 되지 않은 듯,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이게 인생이라면 너무 허무하다. 그럼에도 이반은 너무도 기꺼이 해방이라며 죽음을 맞이한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이유는 아무래도 1) 애 셋이 되어 나름 사회적 성공을 반 포기해 버린 지금 상황, 2) 죽음과 조금 더 가까워진 40대, 그리고 3) 육신은 감옥을 넘어 지구가 감옥이 되어버린 코로나 상황을 1년 넘게 보내온 게 예전과의 큰 차이점이다. 이런 내 상황 변화가 이 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는 자신의 성공이 바로 삶의 성공이란 방식으로 살다가 죽음을 계기로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되고, 깨닫게 되는 한 사내 이야기로 봤다. 따라서 죽음이 그에게 매우 참혹하고 우스꽝스러운 결말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그 인생은 실패라고 마음대로 해석해 버렸다. 오히려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가장 우아하고 멋있는 마무리다. 그는 자신이 마련한 가정 안에서 자신이 아끼는 집 안에서 끝을 맺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직업을 잃어버리고 재산을 탕진해 빈털터리로 싸늘한 주검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는 끝까지 아내의 걱정과(이제 남편을 빙자한 자신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안정적인 딸의 미래까지 보장받고 언제나 걱정이었던 아들의 진심 어린 위로를 받으며 죽음을 맞이한 그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가 세상 사람에게 보이는 것에 조금만 덜 신경 썼더라면 그의 인생은 좀 더 풍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자신의 죽음 원인이라고 생각한 액자에 허리춤을 가격 당한 일마저도 그는 남에게 보이는 멋있는 나에게 많은 초점이 맞혀져 있었다. 아내가 결혼 전에는 좋았다가 다시금 자신에게 짐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은 그만큼 남에게 보여줄 만한 존재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그는 아름다운 딸의 외모에 예민하고 자신감 없는 아들 태도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는, 멋져 보이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과연 그가 죽음의 고비에서 다시 살아나 다시 평범한 삶을 살아나간다면 그는 예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그의 태어난 성품이 원래 그랬던 게 아닐까. 그는 그의 성품대로 살고 그 성품 때문에 죽음 원인을 제공했고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결론을 맺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죽는다. 빠른 죽음이라고 그게 슬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마지막에 언급한 ‘해방'은 이 고통이 가득한 현실 세계에서의 해방이 바로 죽음이라고 얘기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반 알리치는 자신에게 딱 맞는 그 다운 인생을 살다 아름답게 죽었던 것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한순간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