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 다녀왔었다. 내가 원해서 간 건 아니고 남편이 포르투갈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다는 주변 정보를 듣고 서다. 영국 음식은 정말 그걸 먹고 사는 사람이 용한 수준이다. (정확하게 살기 위해 먹는다는 걸 제대로 알려준다고할까?) 포르투갈은 이베리아반도에 스페인과 나란히 있음에도 신기하게, 아니 너무 당연하게 둘 사이는 아주 나쁘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두어 포르투갈 인구 대부분이 거기로 갔는지 인구가 많이 없었다. 포르투갈 사람보다 관광 온 영국인이 더 많은 것 같다. 포르투갈의 옛날 수도였던 포르투를 시작으로 리스본을 찍고 코임브라를 본 후 가장 밑에 남편이 원래 가고 싶어했던 해변으로 가는 포르투갈 일주를 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파티마를 보고 싶었는데 고속도로에 나오는 이정표를 보고 만족해야만 했다. 애 셋을 끌고 그 정도면 아주 열심히 다닌 거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교수 그레고리우스는는 어떤 자살하려는 여인을 구하면서 충동적으로 리스본행을 선택한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여행을 시작했는지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그는 여성이 남기고 간 포르투갈 책 속 저자와 교감하며 그의 일생을 되집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렇게 책 속 인물 아마데우 프라두가 중심이 되어버린다. 아마데우 프라두는 판사 아버지에 꽤 유복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의사다. 그는 첫 사랑 마리아 주앙이 있지만 그녀와 계급이 달라 일찍 사람을 포기한다. 같은 계급의 순수한 여성인 아파차와 결혼한다. 이들은 나름 행복한 결혼을 이어나가지만 아이가 없어 생기는 아주 작은 갈등들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아마데우 아내는 심장마비로 죽어버린다. 아마데우 프라두가 항상 체스를 두며 친하게 지냈던 조르지. 조르지에겐 열정적이고 혁명적인 여자친구 에스테파니아가 있었다. 프라두와 그 둘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같은 만남을 가지게 되나 프라두는 애써 그 감정을 외면하려 최선을 다한다.
그는 의사로서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을 살해한 ‘인간 백정’ 맹그스를 살려 많은 비난을 받는다. 동생 아드리아나가 질식해 죽기 직전 기도를 자르는 응급 수술로 생명을 살린다. 동생을 살리려고 하는 그 마음을 믿지 않은 채 동생을 칼로 찌는다고 생각하며 고함을 친 가족들에게 프라두는 깊은 실망을 느낀다. 그 이후 엄마와 아버지와 관계가 멀어진다. 반면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한 동생 아드리아나는 숨 막힐 정도로 그를 숭배해 답답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삶보다 막내 동생이 살고 있는 자유 분방한 모습을 흠모했다. 반면 아드리아나는 그건 실없는 행동이라며 평생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모두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서 악인을 살려줬다는 이유로, 그리고 급진적인 혁명에 손을 든다는 이유로 대중에게 오히려 미움과 원망을 들었던 프라두는 길을 걷다. 뇌에 혈관이 터져 삶이 끝나버린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몇 권 안 되는 책을 스위스에서 얻은 언어학자 그레고리우스가 아직 살아있는 프라두의 주변인물을 만나며 생명을 다시 불어넣었다. 다시 말해 그 책이 다시 프라두를 부활시킨 것이다.
이는 결코 프라두를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레고리우는 가난한 집에서 공부에 빠져 운 좋게 교수가 됐다. 언어에 빠져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고 반한 제자 플로렌스와 부부의 연을 맺지만 똑 같은 이유로 5년 만에 이혼당한다. 19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책을 통해 그레고리우스가 과거의 플로렌스와 계속 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플로렌스가 자신을 버리고 더 보잘 것 없고 허름한 회계사와 재혼했다는 것에도 화를 내지만 알량한 교수의 자존심인지 내색은 하지 않은 듯 하다. 그 이후 그레고리우스는 기계적으로 학생들에게 오래된 언어를 가르치고 집을 오가며 자신이 가진 감정과 멀리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인생 게임을 포기하려는 사람을 살림으로써 그는 자신이 꺼 놓고 있던 감정과 돌아봄에 대한 스위치가 켜진 것 같다.
낯선 공간은 온전히 나 자신만을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아주 짧은 여행이 아니라 그레고리우스같은 한 달 정도 목표가 있는 여행. 잠깐의 경험이 아닌 삶을 옮겨 놓는 행동. 관성에 의한 몸짓과 생각에서 벗어나 나에 대한 감정과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프라두는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 또한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다. 거울을 보길 꺼려하는 사람에서 당당하게 거울을 보고 뭔가 부족한 점도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까지 찾는 그의 변화를 보는 것 또한 이 책이 주는 재미다.
1800년대는 세계적으로 혼란한 시대였던 것 같다. 제국주의 선방에 섰고 브라질 금광 발견으로 굉장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포르투갈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걸 이 소설을 읽으며 새삼 알게 되었다. 그 정신없는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은 가족 속에서 친구 속에서 직업 속에서 어떤 선택을 통해 변화되는지 프라두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프라두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소명에 따른 삶을 살고자 했을 때 가족이 반대했고 세상이 그를 손가락질했다. 그는 적당히 부당함 속에 자신 직책을 유지하는 판사인 아버지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버지 또한 그건 가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결국 복잡한 사회와 상태 안에 괴로움을 단조로운 그레고리우스의 일상을 깨 주는 데 촉매제가 됐다. 그레고리우스는 더 이상 타성에 젖은 삶을 선택하지 않고 나로서 세상에 그대로 내 보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러니까 언어가 사람들의 빛이로군. 사물은 말로 표현되고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거군.”
프라두의 마음을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언어를 다루는 전문가 그레고리우스에게 전해졌다. 그를 중심으로 배경이 되었던 다른 사람들도 그레고리우스가 지나가자 다시금 프라두를 떠올리며 다시 생명을 집어넣어주었다. 이야말로 진정한 그를 기리고 생각하는 의식이 아닐까. 뜬금없이 전에 읽었던 <시선으로부터>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은 일제 시대를 지나 유명한 작가가 된 할머니의 10주기를 맞이해 할머니가 사셨던 하와이를 온 가족이 다녀오는 이야기다. 젊은 시절 다녀갔던 할머니의 공간을 할머니 핏줄이, 인연들이 같이 오가며 다시 할머니의 생명을 집어넣는다.
정말 누군가 했던 말 대로 삶이라는 건 홀로그램이나 시뮬레이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걸 허무하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건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맞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어로 마음을 남겨 놓을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넘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을 갖게 해 준 책이다. 어쩌면 아주 어려운 책일수도, 너무나 간단명료한 책인 수도 있다. 모조리 필사해 버리고 외워버리고 싶을 수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충분한 그런 책일수도 있다. 아마도 작가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은 여행에 지나지 않는데 그 여행은 아무리 충동적이어도, 준비가 없어도 찬란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 아니, 아름다워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