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고픈 요즘 하루키를 타고 가는 유럽여행

찬란한 1980년대 일본을 살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북소리>를 읽고

by 책한엄마

하루키가 이 책을 썼을 당시, 하루키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일본만큼은 세계 경제 대국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 속에 일본 부자나라 출신으로 대우받는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물론 본인 하루키는 전혀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나 또한 하루키만큼 기간을 유럽에서 살아봐서였는지 모르겠다. 유럽 사람들은 굉장히 직관적으로 상대방을 본다.남편은 일본인 같이 생겼고 나는 펑퍼짐한 체구가 꽤나 중국인처럼 생겼는지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인이라는 얘기를 왜 못 들었냐고? 한국인들은 다 BTS나 한국 드라마처럼 청담동 며느리룩으로 다녀야 한국인인줄 아는데 우린 그러기엔 너무 자유로운 모습이라. 그래, 솔직히 얘기해서 유럽에서 느꼈다. 밀레니엄에는 일본과 한국이 바꼈다.


하루키가 1980년대 쓴 이 책에도 우리 나라 이야기가 실려있다.하루키는 영자 신문을 읽으며 한국 비행기 폭발을 걱정했었다. 그 사건은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렸고 한국인들은, 아니 세계인들은 이제 일본 원전 방사능 오염수를 걱정해주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 영국 이웃집에 살았던 한국인 언니가 내게 말해줬다. 언니는 198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거의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했다고. 우리가 이렇게 비행기도 폭발 당하고 올림픽도 처음 개최해 보고 아기처럼 아장 아장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때, 일본은 겨우 겨우 책을 쓰면 출판을 할 수 있는 작가가 과감하게 짐을 싸서 몇 년씩 유럽에서 방랑을 해도 경제적으로 걱정하지 않는 여유와 국제적 인지도가 있는 대단했고 지금도 꽤나 대단한 나라다. 그런 나라가 추월 당하면 당연히 "라떼"를 들고 혐오하는 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라떼"란 옛날 어르신들이 "나 잘 나 갔을 때는 말이야"라며 말 하는 걸 뜻한다.

아마존 재팬의 한국 패션샵.한국인인 내가 입는 스타일과 꽤 괴리가 있다.그녀가 들고 있는 "라떼"

2019년 유럽 광관지에서 한국어를 듣는 건 어렵지 않다. 심지어 바르셀로나는 이태원인지 헷갈릴 정도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런던 시내에서 길가에 한국인을 찾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2019년 3월에 오신 시어머니는 여권 검사를 받기 위해 엄청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남편이 써 준 편지를 손에 땀이 나도록 쥐고 있다가 보여주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었다. 그에 반해 7월에 들어온 친정 부모님은 마치 지하철 승하차 하듯이 여권을 기계에 찍고 나오면 됐다. 다만 나는 그 자동 입국 심사대에서 극도로 친절한 몇몇 유럽인들에게 "No China here."이라는 말을 들었어야 했지만. 그 이후 우한 폐렴 발발은 얼마나 중국인들을 더 우습게 보는 단초를 제공했을지, 그냥 나는 중국인 취급을 받았을 뿐인데도 중국인들이 안쓰러운 생각까지 든다.


하루키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잠시 런던에 머무르며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설을 몇 편 쓰고 이 여행기까지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특히 그 당시 썼던 책, '노르웨이숲'은 하루키 인생 최초일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큰 히트를 쳤다. 책이 엄청나게 팔릴 때 정작 그는 그 인기 중심이 아닌, 유럽에 있어서 였는지 아니면 그 인기가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그 성공을 힘들어 한다. 그는 그 축복이 인생 가장 큰 위기가 되었다. 결국 그는 유럽의 낯선 삶에서 힘을 얻고 일상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내 존재를 증명하려면 살아가면서 계속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잃고, 세상에서 끊임없이 미움받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나는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358)

그는 글쓰기로 만든 자신이 만든 덫을 다시 글쓰기로 해결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하루키가 결국 이제는 일본인들에게 버림받고 노벨문학상도 죽기 전에나 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가 받아야만 할 것 같은 때에 '가시오 이시구로'라는 이름과 생김새만 일본인이고 글은 누가 봐도 영국인이 쓴 걸로 보이는 작가에게 노벨상을 수여했다. 노벨상 기준을 알 수가 없다. 큰 형님이 적은 사람들이 돈을 걸어 돈을 크게 딸 확률이 있고 또 노벨상을 받아도 욕 먹지 않을만한 작가에게 상을 주고 어두운 곳에서 베팅으로 돈을 버는 건 아닐까? 하루키의 책을 읽는 독자스런 상상력을 가미해 본다.

지구인들이 나름 인정하는 노벨 문학상, 무라카미 하루키와는 인연이 없음.

어쩌면 그에게 노벨상을 받지 않는 것은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보통 때처럼 썼던 소설이 일본과 세계에서 사랑받는 소설이 되었기에 평온한 마음 속이 울렁거렸던 그에게 노벨상은 그의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이름모를 시체 한 구일지도 모른다. 떠올라 누군가 치워주기 전까지 품고 있어야 하는 죽어 버린 생명체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겐 노벨상과 같은 존재일게다. 열심히 뛰면서 그 시체를 들어올려 해결해 버리려나. 이렇게 독자과 필자의 마음은 평행선을 걷고 있다. 다른 사람이 좋아했으면 좋겠는 독자와 그저 아는 사람만 나를 "잘" 알아주길 바라는 창작자.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아주 첫인상이 좋지 않은 작가다. 처음 만남은 이 책에서 소개된 "노르웨이숲", 그 당시에는 '상실의 시대'로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내 나이는 고1, 화자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던 나이였다. 처음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더욱이 내가 17살이라 그 비공감은 타당성이 있었다. 도대체 친구는 열일곱살까지만 살고 싶었던 것인가? 열일곱살은 어릴 때부터 계속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이다. 솔직히 열일곱살이 되니 교육과정도 배울만큼 배웠고 중2병을 지나오니 살만큼 살아 나름 안정기를 찾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니 이런 책도 손에 들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이 좋은 나이에 자살을 한다고? 거기서부터 턱 막혔는데 그 주변인들이 겪는 일들이 가관이었다. 특히 어느 늙은 아줌마가 중간에 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또 그 여사님은 예쁜 열일곱 소녀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세상에!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정도 나이 먹었음 강해야 할 것 아니야? 어린 애한테 그렇게 당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내용 투성이였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해가 되는 소설이 있다.<상실의 시대>영화 중

기타치며 세상에 나가기 싫어하는 소설 속 아줌마 나이가 되고 다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니 조금 이해가 됐다. 무엇보다 이 '먼 북소리'를 읽으니 이 책을 쓴 하루키 나이와 내 나이가 정확하게 일치해 있었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작가만큼의 나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오해도 풀고 또 그 배경이 된 에세이도 읽게 되는 인연이라니. 그렇다. 다시 읽은 '노르웨이의 숲'과 '먼북소리'라는 이 책은 절대 내 의지로 읽지 않을 책이었다. 그만큼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오해하고 있었다. 같이 읽기라는 모임을 통해 같이 얘기하고 나누고 싶다는 힘으로 이 책을 읽고 비로소 무라카미상과 나름 화해를 했다. 화난 독자에서 재밌게 읽어줄 팬으로 탈바꿈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내 생각이 바뀐다는 사실만으로 살아있다는 게 뿌듯할 때가 있다. 살아있지 않았으면 이런 오해는 계속됐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는 것과 섹스를 마구 집어 넣어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어. 이건 표지만 우아한 포르노그래피야. 아무 의미 없는 책이야. 물론 지금 보면 무의미해 진 삶에 대해 예술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돈을 위해 만든 쓰레기로 계속 생각해 왔으니까. 돈만을 바랬다면 1988년도의 혹독한 고통이 작가에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니 확실히 나는 그를 잘못 알았고, 그의 책을 오독했었다. 물론 지금도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나와 성별이 다르고 자라온 배경이 다르고 태어난 시간과 운명이 다르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는 일본이라는 틀을 뛰어넘지만, 일본인으로서 생체를 유지한 사람인 것 같다. 한마디로 "열심히 뛰는 벼룩"같은 일본인 작가를 좋아하는 듯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또한 그런 벼룩과이다. 그러니 열심히 뛰겠지.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일본인 작가는 사노요코였다. 그녀는 오히려 일본인들과 생활이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그녀의 예술활동에 도움이 됐지만 외로움은 그녀의 친구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녀는 한국 드라마와 한국 배우'배용준'에 대해 덕질을 하다 일생을 마쳤다. 반면 하루키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태양볕을 즐겼던 것 같다. 한마디로 일본이라는 장소가 그에게 상실이고 외로움이라 차라리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더 그에게 편했던 것 같다. 그걸 마지막에 '북소리'라는 말로 치환한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자라온 곳, 내가 익숙하게 뿌리내린 곳.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린 떠나야 한다.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나를 좀 더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도록. 내가 있는 곳에서 너무도 심오하고 힘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일들이 좀 더 멀리서, 도망가서 뒤돌아보면 사소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있기도 한다.

2019년 코비드19를 지나온 2021년 여름. 지금은 여행을 하는 게 힘들다. 예전처럼 우동을 먹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갈 수도 없다. 백화점에서 사는 것보다 저렴해 비행기값과 호텔비가 빠진다는 홍콩 여행은 언제 가능할란가. 2주의 무시무시한 격리 기간과 위험이 도사리는 여행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책으로나마 여행을 떠나본다. 하루키의 눈을 빌려 40살 먹은 잘 나가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타이틀을 대신 업고 가끔 히스테릭한 말동무 아내를 가진 전업 작가로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대신 훑어본다. 그에게 이탈리아의 빨간 오토바이 베스파는 소매치기범의 범죄도구다. 그 부분을 보고 한참 웃었다. 최근 본 영화 <루카>에서 베스파는 전혀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행은 또 다른 재미난 사연을 가지고 온다. 끊임없이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고 또 나온다. 그래서 인생은 여행인건지도 모르겠다.

https://youtu.be/D6eGQ9pZO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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