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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길 Dec 01. 2022

서울에는 불빛이 없다(‘89)

안양천으로 낮게 낮게 움츠리고 포복으로 잠입하는 새벽안개

형체도 색깔도 없는 것이, 전신주나 산 중턱에서 소리 없이 하강하여

콧등으로 다리가랑이 사이로 큼큼거리며 냄새 없이 돌아다닌다

     

구로공단으로, 서울 땅으로 목줄 걸고 총총걸음으로 출근하는 철산동, 하안동 사람들

안개 속살 사이로 월세며 전화비, 상하수도비 따위가 차창에 매달려

우와 우와 소리치는 출근버스

     

불이 났어

뜨거운 불길이 치솟고 있어

불이야! 불이야! 외칠 틈도 없어

가슴, 머리가 후끈후끈해지고 사지가 떨려

이 나라 지식인들은 비겁하게 모두 칩거하고 있어

서재에서, 골방에서 혹은 안방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

명함도 주고 받지 않고 술도 퍼마시지도 않고 등산도, 여행도 가질않아

벼 이삭은 추수할때가 되었는데도 쭉정이가 많아

반타작도 힘들 것 같아

시골에 사시는 아버님은 금년도 식량을 걱정하고 계셔

TV나 라디오에선 평작수확을 보도하고 있지만

결국 당신도 월급쟁이 앵무새의 혀

     

서울이 슬금슬금 싫어졌어

월계동 사는 재용 형은 연쇄적인 가을병이 도지지 않았느냐,

바다가 보고 싶어 그러는게 아니냐, 운운하는데

어쨌던 서울이 허물허물 싫어지고 있어

     

“서울에는 사람이 없다, 서울에는 별이 없다, 하늘이 없다...”

빼꼼히 쳐다보는 여덟 살짜리 딸

“아빠, 아빠, 저어.... 서울에는 불빛이 없다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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