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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이 Feb 21. 2024

꽃피는 봄이 오면

일상

 봄이 올락 말락. 확실한 봄은 너무 대놓고 나 예쁘지? 나 좋지? 나 따뜻하니까 살만하지? 기세등등한 게 그냥 좀 그렇고 지금처럼 사늘한 날씨부터 목련 봉오리가 필 때쯤까지가 제일 . '꽃 피는 봄이다'라는 문장보다 '꽃피는 봄이 오면'이 은은한 기대감을 머금고 있는 듯해 듣기 낫지 않은가.


 적인 봄 못마땅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새 학기 공포증 때문이다. 낯선 교실에서, 처음 만나는 30여 명의 동급생들과, 새 시간표, 새 담임, 소문이 무성한 각 과목 선생님들. 적응해야 하는 새로운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들이닥치는 그 시기가 정말 싫었다. 교실에서 나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도드라지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누락되는 것은 불안했다. 출석표에서 내 이름이 불릴 순서를 기다릴 때의 긴장감. 어떤 친구들과 친해지게 될지,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누구일지 탐색하고, 구와 함께 급식을 먹으러 가야 하나 망설이면서 벌이는 눈치싸움. 예비실장 어색하게 학급 회의를 진행하긴 하지만 3월만 지나도 공공연하게 지켜지지 않을 무용한 규칙이 될 것이었. 때의 나에게는 교실 한 내 존재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새 시작의 설렘이나 희망을 느끼는 것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꼭 동반돼야 했던 수많은 가능성과의 고군분투 때문에 봄은 긴장과 불안의 계절이었다. 한 강의실에 내 입지를 마련할 필요가 없던 대학 새내기 때도 새 학기 공포증은 피해 갈 수가 없었는데, 출석 때마다 특이한 이름을 잘못 부르는 교수님들께 정정멘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번 정정하다가 나중엔 잘못 불러도 그냥 대답했다. 다행히 남의 이름에 아무 관심도 없는 고학년이 되고, 교양수업이나 대형강의 들어가다 보니 그런 긴장감이 사그라들었다.


 에만 누리는 즐거움 있긴 하다. 어떤 봄에 친구랑 본관에서 김밥에 맥주를 먹었는데 그날의 온도.. 습도.. 조명.. 은 없긴 했는데.. 아무튼 그날이 좋았 김밥에 맥주는 봄마다 한 번은 먹게 되는 봄정식이 되었다. 뜻하고 푹한 날 피크닉스러운 돗자리에 도시락통에 담긴 김밥 말고 찬바람이 남아있을 때 벤치에 걸터앉아서 쨍쨍한 자외선에 한껏 노출된 채 포일을 벗겨가며 김밥에 약간 식은 맥주 곁들이는 게 봄의 낭만이다. 원래는 캔참치를 별로 안 좋아해서 김밥을 포장할 때 참치김밥은 고르지 않았었는데 한 번은 같이 먹기로 한 상대가 참치폭탄김밥에 김가루를 듬뿍 넣은 국물을 포장해 왔다. 내가 맥주담당 말고 김밥담당 할걸.. 나 참치도 별로고 김 좋긴 한데 국물에 들어간 건 싫어..라고 말하기에는 잘 보이고 싶은 상대였어서 그냥 조용히 먹기로 했다. 근데 함께 먹으니 맛있게 먹었다. 그 이후로는 자발적으로 참치김밥을 고르기도 한다. 마요네즈 듬뿍 뿌려서! 올봄 정식은 제 어디서 먹어볼까.


 공유하는 공통의 시간이나 사건이 있다는 로에게 추억이 된다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진다.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우리는 친구, 동료, 지인 등 가까운 인간으로 정의되며 무기한 ' 이야기'라는 공통분모를 나눠가지는 사이가 된다. 같은 반, 같은 학번, 한 방을 쓴 룸메이트, 같은 회사를 다닌 동료, 같은 해에 어떤 일로 엮였던 사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때의 우리를 묶어 한편으로 분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기억을 꺼내 견주어보 거리가 유사할 뿐 같은 이야기 수 없다.


 공유했던 시간에 관해, 함께했던 우리는 서로 공감할 수 있을까? 내게는 그 봄날이 참치김밥과의 대면식로 인해 새롭고, 약간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조금 떨렸던 걸로 기억된다. 나중에 그날이 어땠냐고 물었을 때 상대는 나와 김밥을 먹어서 좋았고, 다 먹고 어떤 카페에 갈까 고민했다고 했다. 어쩌면 공감이라는 감정은 반드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 간에 느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과 그 속에서 느낀 감정공감하는 사람은 비슷한 상황과 감정을 경험해 본, 그 시간을 함께하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군가에게 공감하고 싶어도 슷한 경험과 생각을 해보지 못한 사람에겐 그게 아주 불가능한  아닐까,라는 나의 의견이 지나치게 회의적인 것 같냐는 물음에 함께 뭔가를 먹으며 듣던 친구는 내가 정의한 버전의 '공감'을 했던가, '동의'를 했던가. 엇이었든 내겐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린 이미 많은 것들을 각자 헤쳐왔다. 긴 시간 한 때 같이 지냈지만 다른 공부를 했고, 수시로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지만 각자의 모임을 만들어 각자의 사람을 만났다. 그럼에도 우리가 늘 가까울 수 있는 이유는 공유했던 공동의 시간과 사건이 만들어준 서로에 대한 예측가능함, 거기서 느끼는 안정감 때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따로 흩어지고 오래 만나지 않아도 엇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각자 늘어놓으며 측가능함을 바탕으로 공감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래 지키고 싶고, 계속 보고 싶은 사이일수록 감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때 막막함을 느낀다. 이제 내가 해본 적 없는 경험과, 비슷하게라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끼는 상대에게 느껴질 거리감은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공유하는 시간이 적어져서 만날 때마다 같은 사건을 꺼내보게 되는 상대와의 관계는 어디로 가게 될까? 공유하는 시간이 더 적어지 경험의 차원이 달라지는 가운데 공감 말고 어떤 감정을 나누며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꽃피는 봄 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제목은 BMK의 노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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