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는 않는 것 혹은 상태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과를 먹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눈앞에 있으니까 먹고는 있지만 못 먹어도 별로 아쉽지 않고 더 맛있는, 예를 들어 체리나 수박, 복숭아 멜론 등이 있었으면 손도 안 댔을게 뻔하다.(사과.. 눈 감아) 그렇지만 사과만 있다면? 안 먹을 이유가 없다. 아삭아삭 상큼 달콤 맛있어. 근데 지금 당장 거부하지 않고 먹고 있다고 해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나? 사과가 없을 때 보고 싶은(먹고 싶은) 경우는 진짜 드물다. 엄마가 몸에 좋으니까 챙겨 먹으라고 할 때 빼곤.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왠지 부족하다. 근데 또 일 년 중 과일 소비량을 생각해 보면 사과를 제일 많이 먹는 것 같다. 어느 자리에 가도 가장 자주 만나고, 먹게 되는 과일 중에 하나다. 너무너무 익숙한데, 좋아하는 과일을 묻는다면 사과는 낯설다.
내게는 버킷리스트나 로망이 딱히 없다. 물론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들은 있다. 해변이 가까운 작은 공간에 머물면서, 당장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죽기 전엔 반드시 누군가한테 보낼 글쓰기. 생경한 나라에 살면서 장인에게 오래도록 한 가지 요리를 배워보기. 근데 거기에 로망이라는 수식을 하자면 민망하다. 그저 내게 공짜의 시간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시공간을 뒤트는 듯한 낯선 경험을 해보고 싶은 것뿐이지 내 삶에서 이뤄보고 싶은 장면, 꼭 해보고 싶은 행위는 없다. 살면서 바라는 것,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나는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다. 그것도 로망이나 버킷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가족에게 어떤 딸과 누나가 되고 싶고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어떤 친구가 되고 싶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어떤' 동료가 되고 싶다. 그 '어떤'이 어떤 형용사인지 아직도 정의하지 못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편하고 안정적이지만 결국 일생에서 내가 되고 싶은 게 누군가의 무엇이라니 아이러니하다. 로망이나 버킷리스트는 어느 한순간 축포가 터지는 것처럼 이뤄질 수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사는 내내 작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 쌓다가 기약 없이 언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의 '무엇'이 되고 싶은지, 되고 싶다한들 그들이 정말 나를 그 무엇으로 바라봐줄지, 죽을 때까지 모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삶의 낯선 경험들을 맞닥뜨려야 하겠지,라고 오늘도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거의가 고객이거나, 면접관, 사업 평가위원, 브랜드 담당자, 내 실력과 인성을 논할 수 있는 업계의 동료였다. 상품을 판매할 때는 함께 방송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다가 흐름에 맞게 이어받아야 두 사람의 입을 통해 한 상품의 일관된 스토리를 전할 수 있다. 매일 생방송을 할 때는 원고가 있었다. 면접이나 오디션에서는 말하는 중간 내쉬는 숨소리도 평가의 대상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처음으로 목적 없이 내 얘기를 듣고 있지만 사적으로는 나를 잘 모르는 청중의 눈빛을 만나니 따뜻하고, 낯설었다. 생각해서 말하고, 말하면서도 생각하고, 방송을 하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한 말을 모니터링하고 자기 전에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또 생각하는 내게 익숙했던 말하기가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는 어느 한 지점에서 우연히 만나 갑자기 서로의 일부분을 나누고 또 자유롭게 흩어졌지만 그 눈빛들은 내게 아주 오래 머물게 될 것 같다.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다. 내게는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딱 두 갈래의 영화만 있다. 보고 나서 마음이 울적하거나 가슴이 울렁이면 슬픈 엔딩, 흐뭇하거나 벅찬 느낌이 감돌면 해피 엔딩. 슬픈 결말의 영화는 웬만해서는 다시 보지 않는다. 현실에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많으니 빚어놓은 영상 안에서는 현실에 없는, 있더라도 잘 없는, '희망'이나 '기적'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그런 결말만 보고 싶다. <범죄도시> 시리즈같이 속 시원하게 확실한 권선징악 이야기. <해리포터>라고 영화 제목을 지었으면 무조건 해리포터 씨가 행복해지는 그런 결말. <나 홀로 집에> 있어도 혼자 집에 있는 주인공은 어떻게든 안락하게 끝났으면 좋겠고 <러브 액츄얼리>는 사랑에 대해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만들어 준다면 좋겠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내가 인생 영화로 꼽는 작품들은 누가 죽거나, 죄다 죽거나, 안 죽어도 다시는 만날 수 없거나,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하거나, 최소 주인공이 오열하며 끝나고,, 그렇다. (결말 스포 방지를 위해 작품들 제목은 생략) 이게 무슨...... 인간은 행복해지고 싶지만 비극에 끌린다는 게 사실인 걸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모든 이야기가 막무가내로 행복한 방향으로 흐르길 바란다. 지금 헤엄치고 있는 나와 우리의 시간들도.
제목은 김명희 작가님의 작품제목 <낯선 익숙함을 찾아서>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