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신청곡: 여정
돌아온 너의 배낭 속에
놓인 세계를 담은 너의 이야기들을
쓰고 읽어서 여기 남기자
원하던 태양을 보지 못했다 해도
파도와 바람이 잠깐 쉬어 주길
구름과 꽃들은 살짝 웃어주기
곡 달담 / 작사 작곡 달담
여행의 과정과 내가 사는 이 일상이 같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다르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목적지를 결정하면 지도를 켜서 길을 찾고, 몇 시까지 뭘 타고 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 늑장 부리다 차를 놓치기도 하고, 다른 길로 갈 걸 아쉬워하기도 하고, 때로 기대치 못한 풍경과 맛집을 마주치기도 한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 지도 미리 알 수 없다. 이토록 비슷한 점이 많으니 인생을 여행으로도 비유하지만 그동안의 나는 인생을 여행하듯이 살진 못했다. 여행은 기한제인 것, 끝을 내가 정할 수 있는 것, 돌아갈 곳이 있는 것. 사는 건 그렇지 않다. 상당히 유사하지만 또 너무나 다른 과정. 지금까지의 생각은 그렇다.
근 몇 년 동안 장기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다. 여행도 못 가고 뭐 했지, 싶다가도 막상 누가 가까운 곳에 며칠이라도 다녀오자 하면 주춤주춤 느미적거렸다. 짐 싸는 게 너무나도 귀찮다. 막상 마음먹으면 캐리어에 착착 넣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름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기도 한데 그 시작이 저세상에서 오는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 너무.. 정말 너무 귀찮다. 귀찮음이 운신의 폭을 참 좁게 만든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에도 크게 흥미가 없다. 짐 꾸리는 것과 비슷하게 막상 초면인 사람을 맞닥뜨리면 대화를 시작하거나 이어가기 힘들지는 않은 것 같은데 '넌 어디서 왔니, 어디를 여행 중이니, 어디 어디 다녀왔니, 거긴 어땠니, 뭐 하는 사람이니?'등등 초반에 서로를 파악하기 위한 나름의 전수조사과정을 생각하면 피곤하다. 어쩌면 끊임없이 나를 어필해야 하는 일을 하다가 생긴 뒤탈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알고 있는 사람들과만 평생을 살 수 없는 노릇일 텐데, 폐쇄적인 마음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쉽지가 않다. 여정이라는 단어가 내게서 너무 멀어진 것 같아서 서운해서 반성의 마음을 가졌다.
어쩌다 스레드에서 두꺼운 사인펜으로 그림을 색칠하는 영상을 봤는데, 그 피드에서 오래 머무른 걸 빅브라더가 파악한 건지 이후에 비슷한 영상이 계속 뜬다. 검은 테두리로만 그려져 있는 그림을 다양한 색의 굵은 사인펜으로 채우는 영상인데, '이게 계속 왜 떠' 하면서도 계속 보고 있다. '좋아요'를 누르니 보다 노골적으로 여러 밑그림의 채색과정을 보여준다. 멀티태스킹엔 약하지만 멀티띵킹엔 도가 터서, 영상을 보며 이런 영상을 하염없이 보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밑그림에 거침없이 색을 칠해나가는데도 검은 테두리 바깥으로 색이 튀어나가지 않으니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진다. 절대 삐져 나가지 않는 유채색의 향연. (쾌감). 하얗고 검기만 했던 스케치에 알록달록한 색이 더해지는 모습도 보기 좋다. 사인펜이 그어지면서 방금 전까지 선이었던 것이 금세 면이 된다. 누구나 확인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언가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 물리적으로 비어있던 공간이 채워지는 과정. 그걸 한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물질적이지 않은 무언가도 채워지는 기분이다.
요즘 사람과의 관계가 마치 물(물은 물이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잘 담아두지 않으면 어디론가 흘러가 버려서 머무르지 않는 것. 한눈 판 사이에 왈칵 내 앞섶으로 쏟아지기도 하는 것. 쏟아진 그것으로 젖어버린 내 옷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 그 순간의 내 기분일까? 그 요소가 무엇이든 얼른 벗어서 말릴지 아예 푹 더 젖기로 할 지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