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는 도착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여행지다. 수도에 위치한 라파즈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항으로 유명한데, 라파즈에서도 가장 높은 꼭대기인 4,0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다. 미리 고산병 약을 먹지 않으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예고 없이 고산병 증세가 찾아올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될 것이다. 서둘러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이동하다 보면 어느새 1,000미터를 넘게 내려온 셈이 된다. 가파른 고도를 이어 주기 위한 이 나라의 주된 교통수단은 '텔레페리코(teleférico)'라는 케이블카. 전철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에 왔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보통은 높은 게 부유함의 상징이지만 라파즈의 고도는 그 수준을 넘어선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 참으로 희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텔레페리코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펼쳐지는 아찔하고도 광활한 전망을 맘 놓고 즐길 수만은 없게 된다. 그건 볼리비아의 빈부격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강과 직결되는 지점이라서 더더욱 그렇다. 대체 어느 정도로 높은 걸까 싶을 텐데, 그들 사이에서도 고산병이 흔하게 목격될 만큼 어느 누구도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죽하면 뛰어다니는 동물마저도 아차-하면서 숨쉬기 버거워하니 말이다. 새삼스레 이 순간 풍부한 공기 속에서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해진다.
그날 방문한 점심 식당은 움직일 때마다 나무가 삐그덕거려 기분 좋은 소음이 들리는 낡고도 아늑한 곳이었다.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고도가 낮았고, 우리는 고산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였다. 식당 메인 홀은 기운을 회복한 손님들로 북적였고, 뷔페 음식을 담기 위한 줄이 벌써 저만치 늘어져 있었다.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은 가이드님들과 나는 그제서야 밀린 안부를 주고받으며 마른 목을 축이고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나는 마지막 주자로 줄을 설 생각이었다. 손님들이 그릇을 다 채우고 음식에 정신을 빼앗기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에게 보내는 은근한 시선들이 거두어졌을 때가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삐그덕 대는 식당 소음 사이로 다른 결의 소음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 듯한 슬픈 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줄곧 맑음을 유지하던 패키지 전선에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있는 게 아닌가.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목격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산은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학창 시절, 옆 교실에서 "누구랑 누가 싸운데~ 의자 던지고 난리 났어~"라면서 친구들이 구경을 가자고 해도 결코 간 적이 없었다. 그만큼 싸움의 상황이 낯선 나였다. 그런데 다름 아닌 내 손님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다니. 이미 식당 한쪽 구석은 두 남자의 겨루기 현장이 되어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옆 반 애들의 싸움을 마주하듯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막막했다. 아빠뻘이 넘는 60-70대 어르신들의 싸움은 어떻게 중재해야 하는 건지 너무나도 난감했다. 온갖 종류의 새끼를 부르는 거친 욕설이 오고 갔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때릴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바로 눈앞에 나이프며 포크며 날카로운 식기류들이 있어 더욱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한참 뒤, 적극적으로 말려주신 가이드님과 다른 손님들의 도움으로 다행히도 두 남자의 겨루기는 거기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만일 신체적인 폭력까지 오고 갔다면 볼리비아 경찰서까지 구경했겠지 싶다. 그렇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 본격적인 나의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두 남자는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렸다. 내 신세가 마치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처럼 느껴졌다. 그때 두 남자에게 못된 심보가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렇게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나의 은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두 남자가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도록 반경 거리를 최대한 띄어놓아야 했다. 유럽 출장 때 지겹게 했던 식당 좌석 배정 업무에서 드디어 해방되는가 싶은 남미였는데... 오히려 두 남자를 VIP로 모시는 특별 좌석 배정 업무가 시행된 것이다. 업무 능력을 펼칠 장소가 식당뿐만 아니라 버스, 비행기, 호텔, 관광지까지로 늘어난 특급 서비스였다. 그중 하나는 호텔 룸 배정이었는데, 두 남자의 룸을 최대한 떨어뜨려 배정해드렸다. 이왕이면 서로 다른 층으로 드리기 위해 호텔리어의 도움도 받았다. 제일 힘들었던 건 비행기 좌석 배정이었다. 남미 내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항공기는 크기가 작았다. 그 안에서 우리 팀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두 남자가 마주치지 않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행 내내 공중 난투극이 벌어질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관광지를 구경할 땐 또 어땠는지. 이 남자 저 남자 번갈아가며 늘어 잡고서 수다의 꽃을 피웠더랬지. 다른 한 남자와의 거리 조정을 위해서 말이다! 이 모든 작전의 성공률이 높았던 건 이중 스파이 덕분이었다. 혼자서는 턱없이 힘에 부쳤기 때문에 다음에 방문할 나라의 가이드님들께 미리 연락을 드려야 했던 웃지 못할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능수능란하고 노련한 기술을 장착하고 계신 그들의 협조 덕분에 두 남자의 으르렁거림은 점차 고르릉-하며 힘이 빠져나갔다.
그래서 승자는 누구였냐고? 글쎄... 그 누구도 이기지 않았다고 본다. 처음에는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들의 싸움처럼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저 이빨에 끼인 고깃덩어리가 빠지지 않아 제 분을 못 이겨 성질부리는 힘 빠진 사자로 보이더라. 두 남자는 어떤 이유로 싸우게 된 거냐고? 당신이 패키지여행에 왔다고 상상해보라. 비싼 돈 주고 온 여행인데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잘 모르는 사람이 내 앞에 앉았다. 같은 테이블을 쓰게 된 상황.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대방의 동석을 거절하기 위한 용기를 낼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낼 것인가? 이참에 나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줄 용기를 가져보려고 한다. 나의 세계에서 지켜지고 있던 권선징악의 규칙을 허물고 이들에게 나눠줄 떡을 마음속에 아주 많이 품고 다녀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