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편] 필릭스와 시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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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어느날 결혼식에서 마주친 프랑스 남자 필릭스,
2주 뒤 그로부터 크리스마스 여행을 같이 가자는 메시지를 받고,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을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냈던 필자.
아름다운 달랏여행 후 그와 함께 호치민으로 이동하는데..
옛날 옛적 제10화에 '베트남 오토바이 문화가 로맨스에 주는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전 화에서도 그랬듯이 오토바이라는 교통수단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밀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고, 종종 베트남에서는 플러팅 차원에서 이 효과를 의도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오토바이 외에도 또 하나의 플러팅용 교통수단이 있으니 바로 슬리핑 버스다. 보통 5-7시간 걸리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좌석이 와식이어서 누워서 잘 수 있다. 필자의 경우 호치민에서 달랏과 무이네로 여행갈 때, 하노이에서 사파와 하지앙 여행갈 때 애용하곤 했다. 저렴하기도 엄청 저렴해서 보통 1만원대 가격이고, 버스사마다 조금씩 퀄리티가 다르긴 하지만 필자와 같이 작은 체구의 여성에게는 자리가 상당히 넉넉해 좌우로 구를 수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한 좌석에 2인이 탑승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다. 로컬 사람들은 1-2만원대 가격을 조금 더 아끼려고 한 좌석당 두 명씩 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각 좌석마다 커튼이 있어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다보니 남녀 한 커플이 들어가 꽁냥거려도 모를 일이다.
필릭스가 버스 좌석을 예매했다. 그의 순수함을 생각하면 필자는 아직까지도 그가 무슨 생각으로 둘둘씩 버스를 예매하고, 그와 필자를 같은 좌석으로 지정한건지 모르겠다. 경제적인 이유로 단순히 돈을 아끼려고 그랬을 수도, 실용적인 이유로 체구가 큰 남자와 작은 여자를 짝지어 공간을 편하게 하려고 했던 걸 수도, 아님 뭐 그 외의 로맨틱한 이유가 있었던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필릭스의 지휘 하에 필자가 먼저 창가 쪽으로 들어갔고, 필릭스가 나의 공간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동안 같은 숙소도 이용하고 서로 스킨십도 있었으면서 다소 밀폐된 공간에 둘이 들어가니 심장이 자꾸 쿵쿵거렸다. 우리는 5cm 미만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후.. 호르몬이 또 팡팡 터졌고, 가까이에 있는 그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너무 간절해져서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을 해야했다. 은근히 그가 먼저 쓰다듬어 줬으면 하고 바랐다만 대낮이었고 옆좌석에 친구들이 있어서인지 필릭스는 조금도 선을 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필자는 베트남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진 다소 이분법적인 인식으로 남녀관계를 생각해온 것 같다.
'남녀가 둘이서 일대일로 시간을 보낸다? = 데이트.
남녀가 둘이서 일대일로 술을 마신다? = 썸.
남녀가 둘이서 손을 잡거나 입맞춤을 한다? = 사귄다.
남녀가 같이 여행을 간다? 게다가 같은 방이다? = 잔다.'
20대일 때는 학교를 다니면서 남자 사람친구도 많았다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대략 30대가 된 이후로는 이성을 '사람 그 자체'로서 보기보다는 '연애 또는 결혼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 같다. 예컨대 어떤 남성 지인과 일대일 시간을 보낸 후 (흔히들 데이트로 여길 시간을 보낸 후) 작별인사를 할 때 쯤 예기치 못하게 그가 갑자기 손을 잡았다고 가정해보자. 필자가 그를 정녕 남녀 막론하고 한 '사람'으로서 대했더라면 분명하게 선을 그어 거절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필자의 머릿속은 이미 사회가 만든 이분법적 남녀관에 절여져 있었다. 아직 그와 연애할 확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동의 하에 같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미안한 마음에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람으로서는 좋아서 더 알아가고 싶지만 연애 대상으로서는 확신이 없는 사람과 사귀어버리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보다 더 세분화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육체적인 관계는 갖지만 낮에 시간은 같이 안 보내고, 밤새도록 껴안지만 성관계는 갖지 않고, 성관계도 하고 시간도 같이 보내지만 키스는 안 하고, 등등. 처음 이곳에서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면 되잖아? 나는 한국 데이트 시스템**이 훨씬 명료한 것 같아서 좋았어"라고 얘기하고 다녔었다. 그런데 밀폐된 버스 좌석에서 조금도 신체적으로 선을 넘진 않지만 프랑스에 있는 사촌동생과 영상통화를 하며 나도 인사를 시키는 등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필릭스를 보며 어느덧 내가 이제 이 사람들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 데이트 시스템이란 아무래도 1화에서 말한 '90년대 연애방식'을 의미한다. 한국 데이트 시스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단순화했음을 이해해주길 바람.
호치민 도착. 그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정말 필릭스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호치민에서 4일을 있을 예정인데 본래 내가 초대된 것은 달랏 여행뿐이었으니 이제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지, 그래도 필자가 호치민에 머무르고 있으니 한 번 정도는 만나서 맥주나 마실지. 사실 버스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한 느낌이 들어 (그 놈의 진도! 나도 어쩔 수 없이 선행학습하던 대한민국인,,) 통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필릭스는 필자의 호치민 여행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다.
내가 예약한 숙소가 그의 집과 같은 동네인 '빈탄'에 있다고 대답하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면 같이 여행 갔던 친구들과 카공을 할 예정이니 같이 조인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필릭스는 UX/UI 개발자이고, Maper 라는 앱을 만들어 발전시키고 있다고 했다.
구글지도의 단점을 보완해 만든 앱인데, 구글지도에서 사용자가 선택한 여러 장소를 취합해서 저장하고 공유하기가 조금 불편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Maper는 좀더 귀엽고 명료한 지도에 개인마다 맞춤형 지도를 만들어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쉽도록 만들었다. 최근에는 호치민 지역의 호텔 또는 식당과도 협업하여 '호치민 관광 추천목록'에 추가된 식당이나 가게로부터 몇 %의 보상금을 받고 Maper 정보와 사용법을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비치해두어 사용자를 늘리고 있다고 했다. 이 비즈니스를 수익화하기 위해서는 호치민 지역 내 소상공인을 많이 알고 좋은 유대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필릭스는 베트남어를 아주 잘하고 베트남을 사랑하는 프랑스인으로서 그 역할을 아주 즐기며 잘 해내고 있었다. 사실 그 앱 비즈니스를 통해 얼마나 돈을 버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집으로 정한 호치민이라는 도시에서 로컬들과 연을 맺으며 상부상조하는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얼마나 그의 열정을 들끓게 하는 것인지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종종 카페에서 시간을 정해 앱 개발을 한다고 했다.
그외 같이 여행 간 다른 친구들도 베트남 로컬의 얼굴을 담은 사진작가, 1인 태국음식점을 차리려고 홍보용 그래픽을 만드는 친구, 베트남 기념품으로 판매할 수 있게끔 베트남의 문화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만든 타로카드를 기획 중인 친구 등이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호치민에서의 삶을 사랑하고 그들의 미래를 호치민에서 꿈꾸는지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관찰할 수 있었다. 필자는 휴가여서 따로 공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이 각자의 호치민 꿈을 구체화하는 동안 이 블로그를 쓰고 있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다들 배가 고팠고, 필릭스는 자연스럽게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필릭스는 그들의 해외파 베트남 건축가 친구가 대표로 관리하는 Notre Maison 이라는 프랑스어로는 '우리의 집'이라는 뜻의 작은 아파트빌라에서 살고 있는데 이 Notre Maison 은 빈탄, 2군 지역에 7채 이상이 있고, 주로 단기 또는 장기 외국인 거주자들을 고객으로 하고 있다. 인테리어 디자인이 시크하게 오리엔탈하면서도 현대적이어서 정말 예쁘고, 넒은 마당, 파티오 또는 옥상을 이용해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유형으로 구성해놓았다.
필자도 호치민에 살았을 때는 이곳에 살려고 집을 본 적이 있었는데, 비용, 동네, 인테리어, 이웃 다 좋았지만 짐이 많지 않은 단기 투숙객에게 더 적합하기도 하고, 파티가 자주 있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을 고요하게 갖기는 어려울 것 같아 다른 집을 선택했다. 혹시나 미래에 호치민 한 달 살기를 해야 한다면 가기 좋겠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자세한 정보는 페이스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릭스는 근처에 맛있는 분짜집이 있는데 포장해서 다른 친구들이 있는 Notre Maison 6호 거실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필릭스의 오토바이로 이동했는데 나는 필릭스의 뒤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기에서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그에게 5년 뒤에도 이곳에 살고 있을 것 같냐고 물어보자, 자기는 할아버지가 되어도 여기서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고 여기가 프랑스보다 집 같이 느껴지고 함께 지내는 친구들이 가족 같다고 대답했다. 호치민에서의 삶이 지긋했던 필자로서는 그 대답을 듣고 우리의 길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꾸리고 싶었던 나는 내심 그가 "언젠가는 프랑스에 돌아가겠지"라고 대답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Notre Maison 6호 거실에서 나의 전 연인인 프랑수아의 와이프와 3개월 된 그들의 아기를 보았다. Notre Maison 대표인 루안과 또다른 베트남 친구도 둘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달랏에서 있던 얘기를 해주며 포장해온 분짜를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난 후에는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필릭스가 자기가 박찬욱 감독 한국영화를 엄청 좋아한다며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내가 너무 필릭스에게 아무 기대도 안 해서인가, 카공 이후 저녁, 저녁 이후 영화 이렇게 쭈욱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뭐 어쨌건 이번 호치민 휴가의 주요 목적은 이곳을 사랑하는 필릭스의 삶을 관찰하고 공감해보는 것이었으므로 좋다고 했다.
필자는 사실 영화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많이 보지도 않는다. 특히 잔인하거나 시끄러운거라면 더더욱! 정말 스트레스 받아서 완전히 다른 세상 속으로 가고 싶을 때만 종종 평화로운 배경의 영화를 본다. 필자가 한국영화 본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하니, 필릭스는 오히려 신나서 자기가 소개해줄 훌륭한 한국영화가 너무 많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박찬욱 감독 영화의 OST가 예술이라며, 그 음악과 서사가 같이 주는 묘한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 OST를 틀고, 내게 자기옷으로 편하게 갈아입을 것을 권했다. 이번 생에서 순수하기 글른 필자는 기분이 야릇해졌다. 그의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본격적으로 침대에서 영화를 볼 준비를 했다. '넷플릭스 앤 칠 (Netflix and chill)'이라는 표현이 말 그대로는 '넷플릭스 보면서 편히 쉰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음흉한 의도가 있는 표현이고 그렇고 그런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정말 <올드보이>를 끝까지 서로의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리고 볼 줄은 몰랐다. 아니 몇 십번을 본 영화라고 해놓고 어떻게 그렇게 진지하게 보면서 리액션을 하는건지.. 다시 한 번 '남녀가 침대에 있으면 무조건 야릇해진다'는 나의 마인드가 썩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집중해서 영화를 보았고, 영화는 예상하던대로 기괴하고 찝찝했다.
영화를 다 보고 노트북을 닫고 나서야 마침내 그가 나의 품속으로 들어왔다. 달랏에서도 서로를 만진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하루종일 같이 호치민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 그에게 어떠한 효과를 주었던걸까? 그전과는 달리 밝은 조명 아래에서 나의 눈을 응시하고 내 작은 콧대를 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달라진 그의 모습에 혹시 그의 마음이 열려서 이번에는 입을 맞추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날밤도 잠이 들 때까지 서로 체온만 나눌뿐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다음날에도 필릭스는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다. 그런데 둘만의 시간을 따로 보내는 것은 아니었고, 그의 일상에 나를 계속 초대했다. 그가 아는 다른 친구가 카페주인이어서 그 카페에서 각자 노트북이나 책을 꺼내 시간을 보냈다. 한 공간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서로를 더 잘 알아가고 커넥션을 느끼는 시간은 아니었다. 줄곧 그는 그의 프랑스 친구들 또는 로컬 친구들을 만나 프랑스어나 베트남어로 네트워킹을 했는데, 내가 그의 일상에 주요인물이 아니라 위성처럼 빙빙 돌아다니는 것만 같아 점차 함께 하는 시간이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때마침 하노이에서 알게 된 영국인인 조단이 연락이 왔다. 자기가 지금은 영국에 있지만 한 달 뒤 설날 때 자기와 둘이서 같이 하지앙 루프 (Ha Giang Loop) 여행을 떠나지 않겠냐는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나는 그 당시 조단을 실제로 본건 조단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 한 번 본 것이 다였다.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남자가 둘이서 여행을 가자고 말한 것이니 평상시였으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의 필자는 필릭스한테서 채울 수 없던 갈망에 조단의 연락이 단비와 같았고 별 말 덧붙이지 않고 바로 그 여행을 승낙했다. 조단과의 여행은 다음 편에 이어서 쓰게 된다.
필릭스와 함께 보낸 시간이 우리 둘 관계에 있어서 '퀄리티 타임 (밀도 있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필릭스는 필자가 하노이로 출국할 때까지 내내 함께 해주긴 했다. 출국 당일에는 둘이서 카공을 하는데 내 건너편에서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듣고 있던 노래가 루시드폴의 '오 사랑 (O amor)'이다.
나는 항상 할 이야기가 잔뜩 준비된 사람인데 너의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러워진다.
뻔한 말로 시작할 수 있겠지. 난 아직 '내 사람'이라고 부를 만큼 친한 친구들이 이 나라에 없어서 외롭게 크리스마스를 보낼 뻔했는데, 네 초대 덕에 많은 사람들 속에서 웃으며 보냈어. 고마워. 사실 이 나라에 오기 전에도 크리스마스는 내게 딱히 아름다운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날은 아니었는데, 이 순간 이후로는 이 계절이 되면 이 여행을 떠올릴 것 같아. 고마워.
네가 어느 정도의 마음의 무게를 갖고 나를 이 여행에 초대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미스테리다. 그저 사회적 모임을 좋아하는 네가, 좋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초대했을 거라는 쪽에 내 배팅을 걸겠지만, 그래도 11월 결혼식 여행 때 서로 총 합쳐서 20분도 채 대화하지 않던 너와 나의 사이에서 나를 초대하기로 한 건 제법 너의 용기를 필요로 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거든. 나는 쓸데없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어.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머릿속으로 온갖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해. 너와 긴밀하게 보낸 8일도 내게는 그렇게 스스로 질문하고 추측하며 써내려가는 시간이었어.
'이 사람은 도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종의 의무감 때문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즐기는 걸까? 나를 매력적으로 느끼기는 하는 걸까? 친구로서의 매력일까, 아니면 여성으로서의 매력일까? 다른 사람들이랑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면 그가 안심할까 아니면 불편해할까?'
많은 문화, 국적과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법 내 머릿속에 데이터가 충분히 잘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너에게 집중했던 지난 8일간은 답을 내리지 못한 물음표로 가득했어. 조금 답답했지만 그래도 흥미로웠어. 나는 원래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한국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고), 뽀뽀하는 것도 엄청 좋아해 -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볼에 뽀뽀해줄 만큼. 나는 더운 사이공의 삶도 이제는 지긋지긋하고, 계획 없고 체제 없는 미래에는 불안함을 느껴. 그런데 본래의 나의 성향과 다른 방향으로 살면서도 매일매일 작은 순간에 진심으로 행복을 느끼는 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깨어진 도자기 틈으로 빛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얼마나 지속될지 보장할 수 없는 너를 향한 나의 관심이 원동력이 되어 너를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었고, 내가 고집해온 삶의 방식에 대해 다시 융통성 있게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어.
내가 나이 들수록 메말라 가는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이 글은 촉촉하다 못해 너무 축축하니? 이런 순간도 잠시뿐이니 지나치다면 눈감아주라. 어제 일기의 한 구절이야:
"187cm의 거구에 그의 손, 팔, 코, 수염도 다 건장한 남성 같았지만 헤이즐 색깔의 그의 머리칼과 초록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는 홍채 색깔, 그리고 어딘가 조금 라따뚜이 같은 그의 미소가 그를 어린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폭 기대어 안기고 싶다가도 도리어 감싸주고 싶은 예쁜 크리스마스 데이트였다."
언제든 내가 생각난다면 다시 초대해줄래? 내게는 시간이나 돈보다 '순간'이 더 중요한데, 나의 고집 있는 삶을 다시 말랑말랑하게 하기 위해 너를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으... 방금 그 말은 너무 느끼했나? 고마워 필릭스. 나의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챕터를 예쁘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해줘서. 너의 새해에도 아름다운 순간들이 가득하길 바랄게.
내 두 팔 안을 가득 채울만큼 큰 품으로, (With a big hug that fills in my arms)
하이디가.
이 편지를 챗지피티를 이용해 한글에서 프랑스어로 번역을 했고, '오 사랑' 노래, 그리고 그와 찍은 사진을 노션 웹페이지에 넣어 그 링크만 한 줄, 내가 찍은 길상사 사진엽서에 적어다가 주었다. 그는 편지를 읽고 너무 감동했다며 자기가 충분히 성의 있게 답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 달 뒤,
그는 한글로 메시지를 보냈다.
모국어가 전달하는 감정은 제2외국어가 주는 것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어와 감정은 깊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유아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배우는 언어에 그들의 사랑 또는 어떠한 감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외에 많이 살던 필자라 하더라도 한글로 메시지를 받고 나니 그동안 베트남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의 시간에서는 또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을 느꼈다. (그 이후로 외국인을 만나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때는 꼭 그 나라 말로 번역해 보내는 전략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 필릭스와 필자는 두 달 뒤, 다시 하노이에서 재회를 하게 된다.
그러나 2월말에는 필릭스도 필자도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그냥 친구로서 저녁 한 끼만 같이 하고 다소 밋밋하게 로맨틱한 관계에 끝을 맺게 된다.
다음 편은 베트남에서의 2년 3개월 중 가장 마지막으로 또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조단을 (드디어)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