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삶이 굉장히 확실하게 보였다. 목표로 하는 꿈이 있었고 어른들의 말씀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자동으로 잘 사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학창시절에는 성적에 따라 삶이 나뉠 줄 알았다. 노력이라는 것에 자동으로 보상이 따르고, 그렇게 간단하게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덧 성인이 되고,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갔다오는 평범한 삶 속에서 나는 분 여전히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안주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영리하게 자신의 앞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아갈 동안,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맞는 줄 알고 있었다.
내 예상과는 달랐다. 삶은 점점 불확실한 것으로 뒤바뀌어 갔다. 코로나가 뒤바꾼 세상과 함께 나의 삶의 방향도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애매했던 군대 시기에 휴학이 맞물려, 게다가 재수까지 한 나는 대학 졸업이 또래보다 밀려있었다. 4학년에 코로나가 엄습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임용고시를 치르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빈 교실로 향한 교생실습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무언가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대다수의 시간을 쏟아 부은 것과 관계 없이 살아가보자고 결심하니, 세상은 더욱 수수께끼같아졌다.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 못했다. 나는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드라마 '미생' 속 장그래처럼 나 자신이 해 온 모든 것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조금 다른 것은, '장그래'의 지능과 통찰력을 따라갈만한 재능도 나에겐 없다는 것이였다.
그나마 우연히도, 나같은 사람도 먹고 살게 해줄 직장이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 1년간 회계업무를 맡아서했다. 차변과 대변이 뭔지도 모르는 나에게 주어진 미션이 조금 무섭긴 했지만, 회계사가 하는 그런 업무는 아니고 경리정도의 업무였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적응할 수 있었다. 당시 쌓았던 조금의 회계 지식은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회사에 적응하면서 운동과 자기계발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달리기도 그때 정말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가끔 시간날때 10분, 30분씩 뛰어다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하프마라톤을 준비하면서 달리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꾸준히 주 3,4회 이상을 달리기 시작했고 점점 거리를 늘려, 하프를 처음 완주할때는 이미 연습으로 하프 이상의 달리기를 종종하고 있었던 때였으니, 풀마라톤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달리면 달릴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꾸준히'의 진정한 힘을 깨달았다.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하여 연습을 시작했을 때, 3km조차도 정말 힘들게 느껴졌었다. 아 이거 잘못 신청했구나 싶었다. 인간이 뛸 수 있는 거리가 맞기는 한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단 뛰는 건 모르겠고 걸어서라도 완주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천천히, 꾸준히 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거리는 정말 쭉쭉 늘어났고, 한두달이 지나서는 7~8km정도의 거리를 정말 손쉽게 뛰기 시작했다.
한번에 뛰는 거리가 10km를 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월 마일리지는 100km를 꾸준히 넘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면서 주말 나들이는 무조건 뛰어다녔다. 당시 미아사거리~석계~중랑천~한양대(한강북단)까지의 거리를 무작정 뛰고 지하철로 돌아오곤 했었다. 자신감이 붙고 나서는 중랑천에서 군자교를 넘어 천호까지 뛰거나, 북단을 뛰어 강변까지 거의 하프정도의 거리를 달리곤 했었다. 하루 종일 달렸고, 해가 지는 한강의 모습이 너무 좋았었다.
어느순간 월 200km의 마일리지를 달성하는 것도 가능해졌고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달리기는 점점 내 삶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빠르게 뛰는 것은 못하지만 오랫동안, 천천히 달리는 재미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풀마라톤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러닝 2년차에 풀마라톤을 패기롭게 도전했었고,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완주에 성공했었다. 그 사이 나는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달리기를 통해 깨달은 것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꾸준하게 무언가를 지속한다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구나라는 것이었다. 목표라는 것은 반드시 클 필요가 없고 매일매일 즐거움을 느끼며 그냥 하는 것을 진짜 목표로 삼아야겠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재능이 있는 엘리트 마라톤 선수라면, 그것으로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어떤 분야의 프로라면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목표와 과학적인 운동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켜야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올림픽 메달을 노리는 사람의 목표가 그저 "매일 뛴다" 정도라면 좀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반적인 삶에서 개인은 굳이 1등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작은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더라도 세상에는 괴물들이 드글드글한 곳이고 나보다 뛰어나며 타고난 재능의 격차가 다른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봉주 선수가 세운 한국 마라톤의 최고 기록인 2시간 7분 20초는 세계에서 더이상 상위권의 기록이 아니다. 범인인 내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따라잡을 수 없는 곳이 존재하고, 사실 그렇게까지 그런 위치에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자신이 실천해나갈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행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불확실이라는 어둠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내가 가진 유일하고 아주 작은 토씨같은 횃불인 것이며, 어두컴컴한 새벽을 여명처럼 비춰 줄 희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