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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13. 2020

형광등을 갈아 끼우다
떠오른 실없는 생각.

꼰대들에게 

신입사원 때 선배 사원이 당신 공대 나왔으니 사무실 형광등 좀 갈아 끼라고 했다.

반 농담이었고 그 사람은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군말 없이 책상 위에 올라가 기쁜 마음으로 '실시' 했다.


Photo by Watermark Designs on Unsplash


집사람이 부엌에 형광등을 갈아 끼우라고 했다.

천정이 높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 좀 불안하다.

집에 아들이 있는데도 나만 시킨다.


'왜 쟤는 안 시키냐'고 물을래다 참는 이유는

'왜 형은 안 시키냐'며 찌질하게 엄마한테 대드는 장면이 오버랩 되어서다. (이 설정에서 나는 동생이다.)


그래도 까닭을 규명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내가 아들보다 그 작업에 적합하다는 몇 개의 가설'을 세우고 진부眞否 검증을 시도해 보았다.


객관적인 분석을 위해 공정이 생명이라고 하는 병무청의 징병검사 항목을 원용했다

병무청 홈페이지



가설 1 : 심리 - 작업의 동기

내가 부엌에 들어가는 시간대엔 굳이 전등이 필요 없다. 반면 아들은 시차 때문에 야간에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어 밥도 밤중에 먹는다. 따라서 부엌 조명의 최대 수혜자는 아들이다. 게다가 나는 하루 두 끼만 먹는 간헐적 단식을 한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 자랑은 아니다). 식구 중에 내가 부엌에 머무르는 시간의 합이 제일 짧다.

검증 결과 부否


가설 2 : 신체

이 작업에 관련되는 신체조건은 신장과 체중이다.

아들은 나보다 키는 크고 무게는 가벼운 젊은 놈이다. 사다리의 낮은 칸에 올라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체중에 의한 사다리의 붕괴 위험이 현저하게 낮다. 나는 그 반대이며 균형감각이 떨어지는 노약자다.

검증 결과 부否


가설 3 : 적성 - 자격 면허, 전공학과,

내가 공대를 나온 건 맞는 것 같다(가물가물하지만). 그러나 공과 대학에 전등을 만드는 건 몰라도 갈아 끼는 전공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따라서 자격 면허도 필요없다. 어쨌든 아들도 지금 공대 재학 중이다.

검증 결과 부否


가설 4: 적성 - 직업

나는 백수가 아니고 브런치 작가다. 퇴직 후 휴식 상태를 백수라고 하면 방학 중에 있는 교수도 백수다.

그리고 백수의 정의는 '일하기 싫어서 놀고먹는 건달'이다. 요즘 구직자나 실직자들을 백수라고 부르는 건 농담 이래도 가혹하다. 퇴직자는 더더욱 아니다.

검증 결과 부否


가설 5: 적성- 경력

내가 아들보다 형광등 갈아 낀 경험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경험이 많으니까 계속 갈아 끼라는 건, 군대 제대한 사람한테 경험 살려서 한 번 더 갔다 오라는 말과 같다.

내가 평생 갈아 낀 형광등의 총량은 대단하다. 이제는 LED 등의 수명이 길어서 교체 수요가 적어졌다. 아들은 서둘러야 내 실적의 반이래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언제부터 경험의 가치를 그렇게 쳐주었나?

검증 결과 부否


모든 객관적 가설의 검증에 실패한 후 다시 가설 1의 심리 쪽으로 돌아갔다.

(아들이나 내가 아닌 ) 집사람의 심리를 가설로 세우니까 미궁에 빠졌던 수수께끼가 뜻밖에도 쉽게 풀렸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소개해서 빛을 본 진화 생물학자 W.D. 해밀턴의 근연도 공식에 주목했다. 동물의 이타 행동을 개체 간에 공유하는 유전자 근연도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촌수가 가까울수록 이타심이 커진다는 주장이다.


집사람 기준으로 아들과의 유전자 근연도는 1/2로 상당히 높은 반면 나와는 0 이다. 유전적으로 관련 없는 나를 작업자로 지목했을 거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면서 가설 1이 검증되었다. 진眞


위험하다고 판단한 작업을 자기 아들 대신 남의 아들한테 시켰을 거라는 가설을 너무 어렵게 설명했다.






예전엔 삼촌 양복 줄여놓았으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류의 가출한 자식 찾는 심인尋人 광고 ( 사람 찾는 광고)가 신문 하단에 종종 실렸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재산뿐 아니라 입던 옷, 구두, 만년필, 혁대까지 물려주었다. 형은 다시 아우에게 전달했다.


이제 바람은 전방위로 분다. 거꾸로 애들이 쓰던 걸 부모가 물려받기도 한다. 작아서 안 신는 등산화, 게임하는데 메모리가 부족한 노트북 피시까지, 유행이 지나서 안 입는 파카도 버리느니 아버지 몫이다. 그래도 재산을 물려주는 방향은 안 바뀌고 그대로다.


우리는 중간에 낀 세대라고 한다. 시차를 두고서 주고받던 품앗이의 질서에 이상이 발생한 걸 한탄한다. 자신은 부모를 모셨지만 정작 자식의 부양은 받지 못하고, 잘못하면 다 큰 자식에 손자까지 떠맡게 되었다는 억울함의 호소다. 이리치고 저리치는 삼각파도에 몸이 부서진다고 아우성이다.


그건 시대의 변화를 너무 좁게 해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생육生育에 보답하는 전통적 도리를 이제는 사회가 개입해서 해결하고 있다. 생애 주기의 연령 층위마다 가족 간에 해결하던 서비스를 점점 더 전문기관에 분산 하청 주는 추세이며 서비스의 질도 좋아지고 있다. 이런 세태를 야박하다고 탄식하는 대신, 사회 변화에 따른 가족 간 애정의 공백을 채우는 궁리를 하는 게 현명할 것 같다.


몇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유행어가 '요즘 젊은애들 틀려먹었다'라고 한다.

동서양 막론하고 기성세대와 신세대는 갈등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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