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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09. 2020

겨울 얘기

생뚱맞게 가을에 봄을 느낄 때가 있다. 가을에 피는 봄꽃을 보면 계절에 대한 착시는 사람뿐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천지의 질서에 빈틈이 없고 사계절은 어긋남이 없다. 


겨울이 오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매년 되풀이되는 재방송인데 세상을 더 살고 더 경험하여 이제는 그러려니 할 노인들이 오히려 변화에 더 예민하고 깜짝깜짝 놀란다. 어느새 가을이여... 벌써 봄이네... 


국민학교 때 여름방학이 끝나면서부터 겨울을 기다렸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가을이 가기도 전에 겨울 걱정을 시작하셨다.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는 손자는 겨울이 오는 걸 두려워하는 할머니가 참 이상했다. 겨울 놀이래야 스케이트도 귀할 때고 기껏해야 개천에서 어른들이 만들어 준 썰매를 지치거나 눈사람 굴리는 정도였는데 그저 좋았다.


그 당시 어른들에게 겨울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도시의 월동越冬 대책은 김장과 연탄이 우선이었고 이 두 가지를 해결한 집은 일단 큰 걱정은 덜었다. 땅에 묻은 김칫독에서 갓 꺼내온 김치는 살얼음이 얼어 국물이 뚝뚝 떨어졌고 겨우내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겨울 반찬은 김치나 김칫국 김치찌개 등 김치 일색이었고 김치죽은 별식이었다. 


당시엔 교실마다 조개탄 난로를 땠는데 학급당 학생 수 80-90명에 비해 난방 용량이 부족하여 아침 수업 땐 연기에 울고 추위에 떨었다. 난로에 얹어놓은 도시락 속에 반찬이 대개 김치 아니면 덴뿌라 (어묵) 였으니 맨 밑에 깔린 도시락에서 풍기는 반찬 타는 냄새가 교실을 진동하며 아침부터 식욕을 돋워 첫 교시 쉬는 시간부터 도시락을 까기 일쑤였다. 달걀 반찬을 싸오는 아이는 반에 한두 명 그러니까 2-3% 정도 소수였다. 극소수의 부잣집 아이가 가끔 장조림과 소시지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왔으나 주위 아이들이 나누어 ( 빼앗아) 먹으니 주인은 맛도 못 볼 수밖에. 고기반찬이 그렇게 고급 음식이었던 걸 상상도 못 하는 요즘 아이들이 오히려 김치를 잘 못 먹는다니 역설적이다.


도시에서는 난방과 취사를 주로 연탄에 의존하였다. 겨울엔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엄마들이 한밤중에 일어나 연탄을 갈아 넣는 게 큰일이었다. 한번 꺼뜨리기라도 하면 옆집에 가서 살아 있는 탄을 꿔와서 불을 붙여야 했다. 

한편 겨울이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연탄이 탈 때 나오는 치명적인 일산화탄소가 방 구들 틈으로 스며들어 자던 사람이 중독되어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목숨까지 잃는 일이 주위에 흔했다. 경미한 경우엔 동치미 국물 한 그릇 마시고 일어나곤 했지만, 모든 식구가 한방에서 같이 자던 그 시절에 일가족이 몰사하는 안타까운 뉴스도 종종 들려왔다. 대개 부실하게 지은 판잣집에 살던 서민이 피해자였다. 당시 주한 미군 방송인 AFKN에서 미군 상대로 주의 홍보하던 게 생각난다. '일산화탄소는 무색무취하고.. Carbon monoxide is colorless, odorless...'


연탄가스로 변을 당해 하늘나라에 가면 대뜸 한국에서 왔구나 하면서 니네는 아직도 연탄 때냐고 놀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연탄 연료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 도시에서는 연탄 구이집이나 가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은 해가 바뀌는 계절이다. 달력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 그림이 좋은 달력은 연말 선물을 대신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달력의 요일이 영어로 쓰여 있다. 어쩌다 영어, 한글 병기한 요일 달력이 있을 뿐이다. 요일 영어의 철자가 쉽지도 않은데 (수요일을 뜻하는 Wednesday는 지금도 내가 스펠링을 헷갈리는 단어 중의 하나다, umbrella, tomorrow처럼 )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반대로 예전에는 달력의 요일이 한자로 되어 있었다. 아직 글자를 못 읽을 때인데 새 달력에 수요일과 목요일의 한자가 똑같이 '木' 자로 쓰인 걸 보고 삼촌에게 물었다. 삼촌은 대답 대신 ' 에이 자식들..' 하면서 중얼거렸다. 어른들은 신문의 정치면을 볼 때마다 그 동일한 욕을 반복했고, 나는 그 욕을 들으며 자랐다. 지금은 내가 이어받아하고 있다, 더 진한 걸로.


거의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 설날이 찾아왔다. 비록 엄마에게 다 빼앗기기는 하지만 세뱃돈은 아이가 목돈을 한번 만져보는 기회였다. 설에서 대보름까지 2 주일은 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 댁에 세배를 다녔다. 친척 집에 갈 때는 그 댁 형편에 따라 예상 수입을 가늠하기도 했는데 번번이 빗나갔다. 중학교 입시에 붙은 후 대박을 기대하고 삼촌에게 이끌려서 '좀 산다는' 친척 아저씨 댁을 찾았는데 도리어 수석을 못해 장학금을 놓쳤다는 황당한 꾸중만 듣다가 온 적도 있다. 요새 애들 말로 '헐'이다. 명절 때 어른들이 모이면 새로운 문물에 대해 얘기했는데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에게 첫번째 질문은 '편하냐'였다. 그리고 돈 세는 기계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다들 궁색했지만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지금보다 많았다. 전화가 없으니 불시에 들이닥치는 손님을 대접하고 또 거지에게 적선하기 위해 집에 항상 밥이 좀 남아 있어야 했다. 찾아 들어온 거지에겐 비록 찬 밥 한 덩어리지만 생색조차 내지 않고 건넸다. 손님은 대접받은 밥을 조금 남기는 게 예의였다. 자기로 인해 축이 났을 주인 식구의 끼니를 배려해서였다. 왔다 가는 손님에겐 차비 몇 푼 이래도 쥐어 보내야 맘이 편했는데 손님이 앉았던 방바닥엔 백 환짜리 지폐 한두 장이 떨어져 있곤 했다. 손님이 흘리고 간 미안한 마음이었다. 가난이 일상이고 양식이 모자랐던 시절이었지만 지금보다 넉넉한 것도 있었다.


겨울이 끝나면 새 학년이 되고 진학도 했다. 보통 집 아이들은 (유치원은 건너뛰고)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 국민학교엘 들어갔는데 나는 지금까지 한글 쓰는데 별지장 없다.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집에서 구두와 란도셀 가방을 사주었는데 둘 다 가죽으로 만든 거였다. 구두와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학교 들어갈 날을 학수고대했었다. 지금도 어쩌다 가죽 제품 냄새를 맡으면 자동으로 가볍게 설렌다.


나는 어느 해 매서운 겨울날 사병으로 군대에 갔다. 청년들에게 군 입대의 경험은 엄청난 충격임에 틀림없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전에 할머니들이 애를 낳은 달이라 몸이 아프다고 한 것처럼 나도 매년 1월 말에 부는 바람에서는 다른 냄새가 맡아진다.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이 행정 착오로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들을 꾼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신기하게 나도 그중에 하나다. 멀쩡한 다수의 젊은이들이 장기간 동일한 트라우마를 겪을 만큼의 큰 충격을 주지 않고도 강한 군인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배가 고파서 밤중에 변소에 가서 부대 근처의 빵 공장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로 헛 배를 채워야 할 만큼 우리 군대가 가난했을까?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따라서 말도 안 되는 꿈을 평생 단체로 꾸지 않을 것이니 다행이다.


우리나라의 예전 어려웠던 시절 사진들을 보면 대개 겨울이다. 6.25 사변은 6월에 일어났지만 겨울 사진이 많다. 그때라고 사철이 없었겠냐만 삶의 구김살은 겨울철이 더 극적이고 사진발도 잘 받는가 보다. 


우리나라는 어려운 겨울을 잘 이겨내고 이제 봄과 여름 사이에 와 있다. 그러나 봄이고 여름이고 영원한 계절은 없다. 언젠가는 겨울이 다시 오게 되어있다. 가을이 가기 전에 겨울이 닥쳐옴을 알고 연탄을 들여놓고 김장을 담그며 미리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봄여름에 겨울이 왔다고 한숨 쉬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취직이 안된다고 헬 조선이라고 입방아 찧으면 정말 헬이 되어버린다. 사라져 가는 단어 '거지'가 돌아올 수도 있다. 헬은 계절도 없고 영원하다. 훗날 지금의 우리나라를 돌아보는 사진엔 여러 계절이 골고루 있었으면 좋겠다.


주역周易에는 사시불특四時不忒 (사계절이 어그러지지 않음)이란 구절이 여러 번 나오는데. 도道와 시時를 중시하는 동양철학의 우주관이다.

天地 以順動 故 日月 不過而四時 不忒 聖人 以順動 則刑罰 淸而民 服천지 이순동 고 일월불과이사시불특성인 이순동 즉형벌청민복 

천지가 순함으로 동하기 때문에 일월이 틀리지 않아 사시가 어그러지지 않고, 성인이 순함으로 동하기 때문에 형벌이 맑아져서 백성들이 복종하니,
주역 뇌지예 雷地豫 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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