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감 Jan 07. 2021

'개나 소나... ' 에서 소는 억울하다.

소를 돼지로


어려서 아버지가 퇴근할 때 손에 뭐를 들고 오시는 날은 일 년에 한 번 엄마 생일 전날이었다. 신문지에 싼 쇠고기 한 칼이 아내의 특별한 날을 잊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언젠가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가서 갈비찜을 먹으며 돼지갈비냐고 물었다가 친구 부인의 즉각적인 '항의'를 받고 쇠고기로 정정한 적이 있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비난받아 마땅한 망언이라는 눈치였다.


우리나라에서 소의 가치는 식재료에서 최고급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등급이 세분화되어있고 원산지에 따라 가격차이도 크다. 쇠고기의 원산지를 속이다 걸리면 7년 이하의 징역이다. 만약에 미국이나 호주 출신 원어민 강사의 연봉을 한국 국적 강사의 반으로 깎으면 대번에 인종차별이라고 들고일어날 것이다.


같은 소끼리도 구별하는데 하물며 다른 가축과 신분의 구별은 엄격하다. 정육점에서야 쇠고기와 돼지고기가 나란히 걸려있지만, 사람들은 옛날부터 소와 말을 개나 돼지 같은 다른 가축과 급을 달리해서 대우해 주었다. 우매한 민초를 뜻하는 '개 돼지'에서도 개와 돼지는 미련하고 못난 부류의 인간들을 비유하고 있다. 사실 쇠고기에 단백질 함량이 많다고 하지만 돼지고기의 영양가도 못지않다. 그렇다고 나처럼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헷갈리면 저렴한 출신으로 분류된다. 중국에 사대를 하던 전통시대에 말은 전쟁보다는 중국에 조공하는 물자로 많이 동원되었다. 이래저래 소가 가축의 으뜸이 되었다.


요즘 많이 쓰는 속담 '개나 소나 (국회의원 한다.)'에서 원래 개는 천한 사람을, 소는 귀한 사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훌륭한 사람들이 맡아하는 일에 별 하찮은 사람들까지 끼어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사이 이 용례에서 '개, 소'를 동급으로 싸잡아서 '아무나'의 뜻으로 쓰는 경향이 있다. 소의 입장에서 분개할 일이다. 그런 의미라면 이 표현은 '개나 돼지나 (국회의원 한다.)'로 바꾸어 말하는 게 온당하다. 소의 해를 맞아 바로잡아 주는 게 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한다.



국립 고궁박물관 홈페이지


삶은 쇠고기를 제례 장소까지 옮기는 데 사용한 준비용 제기祭器이다. 정鼎은 세 발과 두 귀가 달린 솥을 일컫는다. 제기에 담는 희생[제례에서 제물로 바치는 동물]의 종류에 따라 우정•양정羊鼎(양고기)•시정豕鼎(돼지고기)으로 구분하였으며, 각 동물 형태로 그릇을 만들었다. 우정은 발을 소의 머리와 발굽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뚜껑에는 ‘牛’ 자를 새겼다. 희생 중에서 소는 특히 귀한 제물이라 종묘제, 사직제 등 가장 중요한 국가 제례에서만 사용하였다.

[출처] [2021년 1월] 소띠 해맞이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 : 삶은 소를 담는 세 발 솥 우정|작성자 국립 고궁박물관.



어릴 적 제사 지낼 때 나는 진설해 놓은 쇠고기 산적을, 철상撤床하면 공격할 대상 1호로 찍어놓고 지루함을 견뎌냈다. 귀한 쇠고기가 옆에 수행하는 보조 메뉴도 없이 넓적하게 도발적인 크기로 제기에 올라앉은 모습은 기이했다. 거기다 마늘도 안 들어가서 당시 내 입맛에 제대로 맞았다.


인도 맥도널드에서 파는 햄버거의 패티에 소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소를 숭배하는 힌두교 영향이지만, 중동에서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유는 반대로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돼지를 기피 동물로 명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소의 근면하고 유순한 성질을 보고 의義로운 동물로 여겼고, 절에 가면 벽에 그려져 있는 십우도十牛圖는 사람의 본성을 깨닫는 과정을 소를 찾는 비유로 그렸다고 한다.


제물을 뜻하는 희생犧牲의 두 글자는 부수가 소 우牛 자다. 그리고 알린다는 뜻의 고할 고告 자도 [소(牛)를 제물로 바쳐 놓고 신에게 소원을 말한다는(口)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양에서 소를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운 동물로서 신성시 여기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최원균(왼쪽) 할아버지가 소에 쟁기를 걸어 밭을 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농경사회에서 소는 농사와 이동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고급 일꾼이자 재산이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에서처럼 도둑의 최상급에 소가 관련될 만큼 소의 재산적 가치는 막대했다. 소는 힘이 세고 순해서 농가의 대표적인 노동 가축이 되었다. 가축 중에서도 특히 소를 생구生口라고 부른 이유는 식구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 주었다는 의미다.


한자에서 특별하다는 뜻의 특特 자는 소 우牛변인데 수컷이라는 뜻도 있다. 이끌 견牽 자에도 소 우牛가 붙어있다. 모두 노동과 관련이 있다. 집집마다 소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서 소가 없는 사람을 포함하는 소겨리라는 특이한 품앗이 조직도 있었다고 한다. 소를 매체로 엮은 노동협력조직은 겨리 사촌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생활 공동체까지 확장되었다. 윷놀이의 도·개·걸·윷·모는 각각 돼지, 개, 양, 소, 말의 옛 이름이라고 하는데 놀이의 이름을 그중에 윷으로 칭하는 것도 농경사회에서 소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소는 사람이 기르는 가축 중에 덩치가 제일 크다. 풀만 먹으면서 평생 시키는 대로 일만 하다 죽어서도 식재료와 가죽으로 남김없이 내준다. 오죽하면 속담에도 '밤 까먹은 자리는 있어도 소 잡아먹은 자리는 없다.'라고 했을까.


소처럼 일하고 쥐처럼 먹으라는 속담이 있는데 사람의 이기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일은 많이 시키고 보상은 작게 하고 싶은 악덕 사용자의 심보다. 소를 보고 유순하고 근면하다고 생각하는 건 다분히 부리는 사람의 아전인수식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온순하고 우직하다는 관대한 표현으로 소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지만 근로의 주체인 소는 죽어난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코뚜레를 움켜쥔 주인이 잡아 끄는데 소가 포악하다 한들 무슨 수로 저항하겠는가? 우직은 무슨 개뿔... 소통도 안 되는 마당에 최후의 발악은 버티는 것인데 사람들이 보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소고집이 질기단다. 길들여진 가축의 운명이다. 사람도 이런 걸 알기 때문에 자신은 고단한 소 꿈보다는 먹을 복 있는 돼지꿈 꾸기를 바란다.


소의 해, 신축년 정월에 소에 대해 알아보았다. 

소의 행동은 느림으로 대표된다. 느림에 수반되는 이미지는 유유자적, 여유 그리고 한가로움이다. 그래서 세종대왕 때 맹사성은 군자의 유유자적을 배우기 위해 말 대신 소를 타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올해가 소처럼 조금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라면 끓이다가 떠오른 실없는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