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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12. 2020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코로나가 멈춰 세웠다

회사후소 繪事後素

논어 팔일편의 8장에서 공자는 제자 자하와 더불어 향기로운 문답을 이어갑니다. 시를 읊다가 그림을 그리고 예를 논하더니, 자하를 무척이나 대견해하며 다시 시를 이야기해보자고 하네요. 이 문답이 주는 메시지는 회사후소 繪事後素인데요 ( 회사 끝나고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이 아니고요), 그림을 그릴 때는 좋은 바탕素을 먼저 마련하고 나서 색칠繪을 하라는 가르침이지요. 바탕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이와 비슷한 구절이 논어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학이편에 나오는 '군자는 근본에 힘쓰라君子는 務本 本立而道生'는 말이 그 하나인데, 대개 이렇게 자주 반복되는 주제는 역설적으로 실천이 어려운 것들이더군요. 생활 용어로는 잔소리라고도 하고요.


바탕素과 꾸밈繪는 근본과 말단末端에 해당합니다. 논어의 옹야 편에서는 바탕이 과하면 촌스럽고 지나치게 꾸미면 사치스럽다고 했지만, 바탕이 부실하면 아무리 꾸며봐야 허사입니다. 모래 위에 쌓은 집(사상누각)은 금세 무너져 내립니다. 그렇다고 지붕을 올리다 말고 주춧돌을 놓을 수는 없지요. 바탕을 마련하는 일은 때가 있고 순서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먼저 하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지요.




지금 우리는 회繪, 즉 꾸밈이 주도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차근차근 순서대로 소素를 다지도록 세상이 놔두지를 않지요. 우리는 착하게 줄 서서 순서를 기다리다 앞에서 줄이 끊겨 좌절했던 기억을 트라우마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집단적인 소외감이, 어떻게든 남보다 먼저 성과를 내고 보자는 조급한 방어기제를 자극합니다. 보디빌더가 정직하게 땀을 흘려 몸을 단련하는 대신 스테로이드 약물을 주사해서 속성으로 근육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인성보다 외모가 앞서는 건 이 시대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인성이 소素라면 외모는 회繪가 아닐까요? 초등학생들이 화장을 하는 걸 보고 말은커녕 혀만 한 번 클릭해도 꼰대 등급이 올라갈 정도지요. 급증하는 외모 관리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나라 의대생들은 의학적 성취도를 포기해가며 성형외과 전공으로 몰립니다. 한편 흉부외과 의사가 부족해서,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제 때 치료를 못 받아 죽어갑니다. 그래서 심폐소생술이 국민 기본기가 되었을까요? 미용이 생명에 우선하는 이러한 본말本末의 전도는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목격됩니다. 결혼식장에 가서 축의금만 디밀고 피로연장으로 직행하고, 학교 가서는 잠자고 공부는 학원 가서 합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이 한국 화장품만 찾는다고 해서, 미국 아이들이 한류 음악에 열광한다고 해서, 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말초적 가치관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조절 기능에 일시적으로 장애가 생겨 나타나는 부副작용일 뿐입니다. 파격이 아닌 파행이며, 변화가 아닌 변질입니다. 더 방치하면 복원력이 상실되고 맙니다. 약물로 근육을 만든 보디빌더의 몸은 서서히 파괴됩니다. 치국평천하에 정신이 팔려서 수신제가를 게을리하다 망신하는 지도자들의 이야기는 무한 리필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세상 돌아가는 알고리즘은 그대로입니다. 코로나가 세상을 잠시 멈춰 세웠습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되돌릴 기회가 왔습니다. 학교에서 자는 아이들을 이제 고만 깨우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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