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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26. 2021

'개 꼰대스러운''개' 접두어에 대하여

© Capri23auto, 출처 Pixabay



'한국어에서 개는 철저한 경멸의 말, 혹은 욕설, 상소리에 나타나는 접두어이다.'


영국의 지리학자 버드 비숍이 19세기 말 조선의 모습을 관찰한 책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한 말이다.


'개 X 끼', '개망신'처럼 뒤에 오는 명사를 부정적으로 강조하는 '개'의 쓰임을 일컫고 있다. 품위 없는 비속어지만 오늘날도 쓴다.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 국방부 장관 제임스 매티스의 별명이 'mad dog'이었다고 해서 우리 언론에서 '미친개'라고 소개했다.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미친개'는 쌍욕인데, 미국에서는(점잖은 말은 아니라도) 군인, 운동선수한테 쓰는 거칠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아이 1 : 집에 안 가?


아이 2 : 오늘 oo 도서관에 봉사 가는 날...


아이 1 : 아, 개부럽다. 내일 봐.



지난주에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들은 중학생 들의 얘기.

학교 끝나고 봉사하러 가는 '착한' 친구를 부러워하는 또 다른 착한 아이 사이의 대화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뒤에 오는 말을 강조해 주는 '개' 접두어를 확장해서 쓰는 일이 있다. 어법은 19세기 말과 비슷하지만 명사뿐 아니라 형용사, 부사 앞에 가리지 않고 붙는다. 더 중요한 차이는 반드시 부정적인 강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이득, 개꿀, 개웃겨' 따위의 말에서 '개'는 속어이지만 비어(욕설)는 아니다. '더럽게 힘이 세다'에서 '더럽게'와 비슷하다고 할까? 여자 친구한테서 '개잘생겼다'라는 칭찬을 들은 아이가 화를 낼 것 같지 않다.


그동안 '개판'처럼 격 떨어지는 용례에 개가 동원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을 텐데 어느 정도 견공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반려견의 위상이 반영된 듯하다.


'매우'처럼 정도를 더해주는 부사를 놔두고 (내가 보기에) 부적절한 '너무, 완전, 대박'을 한동안 즐겨 썼다. 이제는 '개' '찐(강추), 핵(맛), 꿀(팁), 왕(재수), 짱(감사)같은 접두어를 만들어 붙이고 있다. 이유가 무얼까.


'또래끼리 자극적인 표현을 써서 센척하고 싶어서' 또는 

'틀에 박히지 않고 신선해서' 

몇몇이 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한두 번 따라 해 보니 내뱉는 어감이 쉽고 재미있어서 유행어처럼 퍼졌을 수 있다. 도서관에 봉사하러 가는 친구가 부럽다는 말에 굳이 자극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이미 습관처럼 쓰고 있어서 튀어나왔으리라.


이런 현상은 잠시 유행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표준어로 굳어질 수도 있다.

자연적인 언어의 변천이라면 그 물꼬를 인위적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속어도 언어에 추가되어 표현을 풍부하게 해주는 순기능이 있다. 다만 속어가 표준어를 도태시키고 기존의 표현을 대체하지 못한다면 그 언어는 변천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다. 부족해진 표현을 외국어에서 차용하는 불행한 수순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말의 흑 역사다.


이런 말 쓰지 말자고 해봐야 실속 없이 꼰대 지수만 올라갈 뿐이다. 사용자 스스로 성찰하고 판단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라는 낡은 표현을 이제 와서 굳이 만들어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 된다. 개를 좋아하는 젊은이들로서 배신적인 언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알고 보니 '개' '개꼰대스러운' 접두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이런 말은 사라진다.




그게 아니면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길가에 핀 개나리를 반기면서 '질이 떨어지는 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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