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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Sep 22. 2021

'황혼의 미학'
훌륭하게 나이 드는 기술 교과서

독서록

최종적으로 노년에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가운데 분명 가장 어려운 과제다. 여러 종교의 현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자아보다 더 큰 것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하려면 자아가 먼저 죽어야 한다.'
76 페이지 / 3장 놓아버리기 중에서



황혼의 미학 / 안셀름 그륀 저, 윤선아 옮김



내가 속한 독서 동아리에서 '황혼의 미학' 읽고 함께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한다.


독일의 카톨릭 신부가 쓴 이 책의 원 제목은 'Die hohe Kunst des Älterwerdens'이다. 직역을 하자면 '나이 들어감의 고양高揚된 기술'인데 'KUNST''기술'로 옮기니 좀 '저렴'하다. 그렇다고 예술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수준 높은 기술을 예술이나 과학으로 대우해주는 풍조가 생겼다. 음식을 먹으며 예술이라고 감탄하고, 침대는 과학이라고 우긴다. 천박하게 예술과 기술을 수직적으로 서열화하고 있다. 나이 어린 예술 천재는 있어도 나이 어린 기술 장인은 없다던데.


'The Art of Loving 사랑의 기술'도 저자인 에리히 프롬이 모국어인 독일어로 썼다면 'Kunst' 란 표현을 썼을 것이다. 독일과 우리나라에서 '기술'을 보는 시각의 차이를 실감한다. '미학'이라고 옮긴 번역자의 탁견에 감탄한다. 원작 제목이 독일식이면 번역 제목은 한국식이다.


저자 안셀름 그륀이 62세에 낸 이 책은 훌륭하게 나이 드는 기술을 전하고 있다. 성경 구절과 여러 현자들을 인용하여 수도자인 저자로서 체험의 한계를 해결하고 설득력을 더했다. 삶의 신비를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노인이 되려면 자아의 거품을 버리고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반복해서 주문하고 있다.


노령 인구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적 우려는 부양 비용에 대한 탄식이다. 또 하나의 피부양 집단인 아이들은 줄어드는 걸 걱정한다. 투자 가치가 상이한 두 집단에 대한 차별은 자본주의보다는 종족번식 본능으로 이해하는 게 맘 편하다.


노인이 지혜와 존경을 회복하면 적어도 사회가 부담하는 심리적 비용은 줄여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노인판 생활의 지혜라고 해도 될 만큼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에서 유용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요령'을 전해주고 있다.


'노년은 인생의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가치와 매력, 지혜와 슬픔이 있다' 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노년'을 '중년'으로 대체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야기의 확장성도 있다.



동아리

신앙의 깊이에 따라 책을 이해하는 스펙트럼이 넓음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이해할 수 있게 인용된 성경의 멧시지를 일반화시켰음



총 10장章 중 '-하기'로 끝나는 세 개가 핵심 '기술'로 보인다.


2장 자신을 받아들이기

3장 놓아 버리기

9장 자신을 넘어서기



2장 자신을 받아들이기


이런 책에 단골로 등장하면서도 실천 난이도 최상급인 '용서' 나온다. 그리고 용서의 대상은 언제나 자신으로 시작한다. 얼마 전에 우리 동아리에서 다룬 책 '모리의 화요일'에서도 죽기 전에 자신을 먼저 용서하고 나서 다른 이를 용서하라고 했다.


용서를 삼단계로 설득했다. 1) 하느님이 너를 용서했듯이, 2) 너 자신을 괴롭힌 운명의 시련 즉 너의 과거와 화해하고 나면3) 비로소 너는 너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 과거를 잊으라는게 아니고 과거를 대하는 자세를 바꾸라고 한다.


과거와 화해하고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했으면 너의 한계와 화해하라고 한다. 화해는 도전이 아니다.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아' 하며 웃통 벗고 부리는 객기와는 대척점에 있다.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면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말에 공감한다.


젊은 시절 오르던 산을 다시 오르면서 너무 무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렇게 무리하면 심장마비나 다른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이 한계 내에서는 스포츠 도보 여행은 물론 일에서도 많은 것이 가능하다.
43 페이지


지금 친구 몇과 지리산 종주를 계획하고 있다. 보통 우리 나이에 무리라고 하는 힘든 산행이어서 주위에서 '미쳤냐'라는 힐난을 받는다. 우리의 체력이 특별하거나 특별함에 도전하려는 것은 아니다. 계획을 짠 후 몇 달간 근교 산에서 연습했다. 체력을 보강하는 목적도 있지만 우리의 한계를 알자는 거였다. 우리 능력의 8부 정도를 사용해서 다치지 않고 후유증 없이 백두대간 북진 출발 구간의 마루금을 밟아보고 싶을 뿐이다.


동아리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 , 놓는 것은 사랑 , 넘어서는 것은 소망과 통함



3장 놓아버리기


세속적인 재산에서 권력까지 미련 갖지 말고 버리라는 얘기다. 나이 먹으면 점점 더 놓기가 어렵고 고통스러워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노약해질수록 위기감이 들어서 가진 것에 애착이 생기고 움켜쥐게 된다. 이사를 가는데 90세를 넘긴 노모가 아무것도 못 버리게 해서 난처했다는 얘기를 동료로부터 들었다. 나중에 쓸 일이 있다는 어머니께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답답했다고...


'건강에 매달리지 않기'도 참신한 '기술'이다. 요즘 젊으나 늙으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유난 맞다. 건강이 인사말을 대신하고 건강을 잃으면 실패자나 되는 것처럼 건강해야 함을 강요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단체 대화방엔 출처 불명의 건강 비결들이 넘치고 있다. 평소 몸 관리를 잘해서 건강을 지켜야겠지만 때가 되면 내놓을 수밖에 없다. 움켜쥐고 안 놓으려고 병원에 출근 도장 찍고 밥 먹듯이 약을 털어 넣는 노인들을 보면 안쓰럽다


최종적으로 노년에 버리라고 요구하는 건 자아다. 책에서도 이것만은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인정한다. 자아EGO를 버려야지 (망가뜨릴 필요까지는 없고) 하느님이 만드신 원초적 거짓 없는 자기SELBST를 되찾는다고 한다. 성리학으로 하면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같은 사단四端이다.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 (희로우구애증욕喜怒憂懼愛憎欲)의 자아를 걷어버리면 사단이 나타난다. 놓아 버림의 극치다. 자기를 찾으려면 차라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는 게 빠르겠다.



동아리

중용 1장의 천명지위성[ 하늘이 준 것을 천성이라고 함天命之謂性 ]에서 성性이 하느님이 주신 착한 본성과 통하는 것 같음


굳이 노인이 되어서 한꺼번에 버리려고 애쓸 것 없이 재활용 쓰레기처럼 평소에 요일 정해놓고 자아를 처리하면 안 될까


책에서,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노년엔 배우자가 먼저 죽을까 불안하다고 함. 다른 건 몰라도 배우자 상喪만은 아내가 맡아주었으면 좋겠음




9장 자신을 넘어서기


입만 열면 정년퇴직 전 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말하는 노인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분주한 생활은 나이가 많아도 정력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피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표시로 여겨진다.
155 페이지 / 에파 예기 인용


은퇴 후에 분주한 일정을 빗댄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퇴직 후에 EH (everyday holiday) 클럽에 자동 가입되면서 각종 모임이나 활동에 한 풀듯이 쫓아다닌다. 소속이 없어진 허전함에다 부를 때 안 나가면 다시 안 부른다는 '미신' 때문에 줏대 없이 여기저기 고개를 디민다. 퇴직 후엔 남은 게 시간밖에 없을 거라는 주위의 그릇된 인식으로 고독의 축복도, 자유도 없다.


수도원의 원로 수사들을 위해 TV를 놓으려다 취소했던 사례를 들면서 '내면의 영상을 봐야 할 노인들이 수천수만 가지 TV 영상들에 파묻히는 건 영성 생활에 대한 파산 선고'나 다름없다고 질타한다. 요즘은 유튜브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각종 매체가 경쟁적으로 유도하는 영상에 노소 가릴 것 없이 내면이 출렁이고 있다.



마지막 10장은 죽는 연습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1


노인의 마지막 영적 도전은 죽는 연습이고,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노인에게 요구되는 죽는 연습이 실현된다고 한다. 

죽는 연습도 생소하지만 그 실현의 원리도 난해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인생 설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자기 의지의 행위로 변화시키라는 말은 따라 해 볼 만하다. 죽음에 끌려 가느니 죽음을 끌고 가는 게 깔끔하긴 하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된다.


동아리

알고 있는 얘기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 수행하 듯한 사유가 필요함

죽음은 사랑의 완성임, 늙을수록 사랑을 바탕으로 영적으로 살아야 함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저항임,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우는 것도 두려움과 저항의 표현임


일찍 떠나신 어머니의 죽음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죄와 연약함을 알게 해 주셨음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하듯이, 우리의 죽음도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이어야 함

책 '모리의 화요일'에서 읽은 구절: '누구나 죽는다. 기왕이면 죽음을 가치 있는 일로 승화시키자'가 떠오름





이 책은 모범 노인이 되기 위한 교과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읽는 내내 논어 위정 편에 나오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나이 칠십에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구절이 떠올랐다. 서양의 천주교 사제가 쓴 글임에도 동서양 현자들의 사상을 두루 달통하고 있다. 

내용을 모두 이해한 건 아니지만 두고두고 새겨보는 것도 독서의 영역이다.


노년을 사계절 중 가을에 비유한다. 곧 닥쳐올 스산한 겨울이 두렵기는 하지만 가을은 만물이 이루어지는 계절이다. 자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노인에겐 빼앗기고 뜯긴 상실의 계절일 뿐이다.


가을바람, 빛 그리고 지금 날아와 창에 부딪히는 빗방울까지도 찬란하다.


이 가을에 한 번 폼나게 늙어볼까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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