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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25. 2022

박빙의 개표 방송이 각본이었다는
언론 보도

연출의 의미



이번 대선은 선거 당일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접전이었을 뿐 아니라, 개표 과정 또한 이튿날 새벽까지 당선자를 알 수 없는 초접전을 '연출'했다.  

몇 주 전에 치른 대통령 선거 다음날 신문 기산데 이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아슬아슬한 개표 방송을 위해 각본에 따라 두 유력 후보의 득표율을 근접하게 조작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사실일 리가 없지만 '연출'의 사전적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


연출演出하다 :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만들어내다. (영화, 연극, 방송 등에서 ) 각본에 따라 모든 일을 지시하고 감독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다.

연출演出은 공연을 전체적으로 설계하고 여러 요소를 통제하여 총체적인 효과를 창출하는 인위적인 활동이다. 대개 각본을 미리 만들어서 그대로 따라 한다.

사전



대통령이 000 장관과 긴밀히 협의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언론 보도

대통령이 장관 데리고 연기를?


앞서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은 지난 16일 단독 오찬 회동을 갖기로 했지만 당일 전격 취소하면서 신‧구 권력 갈등 분위기를 '연출'했다. 언론 보도

문과 윤이 갈등하는 장면을 찍으려고 점심 약속을 취소?


미국이 대러 제재 최후 카드인 원유 수입 금지를 검토 중이라는 소식에 글로벌 금융 시장은 벌집 쑤셔 놓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언론 보도

글로벌 금융 시장도 다 짜고 치는 고스톱?


3월 9일 노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국 평검사와의 대화’를 열어 검찰 개혁 문제를 놓고 평검사들과 설전을 벌이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2011. 3. 언론 기사

공연이나 방송 프로 제작의 감독을 뜻하는 연출演出이 어색하게 들어간 문장을 정치면 기사에서 흔히 발견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2011년 기사에서도 검색되는 걸 보니 적어도 10년은 넘은 것 같다. 보여주기 위주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딱하다.


아무리 정치 현실이 극적劇的이라고 해도 그걸 각본이라는 건 거북하다. 마치 9.11 테러를 부시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의심하는 것과 같다. 정치가 쇼라고 들 하지만 그들에겐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꾸밀만한 성의도 머리도 없다. 연출은 작품성으로 평가하는데 감동적인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연출이 아니라는 또 다른 근거다. 보는 사람을 동시에 불쾌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작품은 별로 없다.




맨 위에서 예를 든 기사의 '초접전을 연출했다'는 '초접전을 벌였다' 정도로 바꿔 쓰는 게 마땅할 듯하다. 추측이지만, '벌였다'라는 동사가 좀 심심해서 자극적인 표현을 대충 갖다 쓴 게 연출이 아닌가 싶다. 누가 어쩌다 잘못 선택한 어휘가 그럴듯해 보여서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따라 쓰다 관용적 수사가 되었나 보다. 이러다가 조만간 (아니면 이미) 사전에까지 올라가면 흥미로운 상황을 묘사하는 용례로 굳어진다.


기사의 서술부에서 동사를 '초접전'이라는 명사형 한자어 두 자에 우겨 넣으니 그다음에 오는 말이 싱겁고 군더더기가 되어버린다.


'밥 먹었다'를 '식사'로, '밖에 나갔다'를 '외출'로 압축하고 다시 획일적인 조동사 '했다'를 붙여 마감을 하는 식의 낭비적인 한자어 서술이 문장을 따분하게 만든다.


주어-목적어-동사로 이루어지는 한국어 기본 문장에서,

'밥 먹었어?'처럼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랑해'처럼 목적어까지 줄여도 말이 된다.


그래서 우리말에선 끝에 오는 동사가 문장의 핵심인데, '먹다', '죽다' 같은 순우리말 동사가 점점 외면당하고 있다.


동사가 퇴화하고 빈곤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며 말하는 게 불편해진다.


불편한 말은 안 쓰고, 안 쓰면 없어진다.



https://brunch.co.kr/@hhjo/73






절기상 춘분을 이틀 앞둔 19일 강원 인제와 양양을 잇는 한계령에 많은 눈이 내려 아름다운 설경을 연출하고 있다. 언론 보도


하다 하다 이젠 자연현상도 연출이란다.


다만 여기서 하느님이 문장의 주어라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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