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와 이하
코로나에 확진되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통지문의 말투가 달라졌다.
'귀하는 코로나19 확진(positive(+))으로 감염병 예방법 제41조 및 제43조 등에 따른 격리 대상 .....'
귀하로 시작하는 메시지 1번은 코로나에 걸렸으니까 밖에 나돌아 다니지 말라는 격리 명령이었다.
몇 달 전 음성이었을 때 받은 문자에선 ' ㅇㅇㅇ 님'이었는데, 양성의 나는 이제 귀하로 신분이 바뀌었다. 하나도 귀하지 않은, 강제 처분 대상을 주눅 들게 하는 호칭이다. 찬바람이 쌩 부는 법조 동네에서 귀하와 피고는 같은 항렬이다.
이어서, 무서운 얼굴로 근거 법령을 들이댔다. '아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하며 개길까 봐 으름장 놓는 건가. 귀양지에서 금부도사가 읽어 내려가는 위리안치 특명이 떠오른다. 사약을 내리지 않는 게 다행이다. 내가 가축이었다면 우리 동네 사람들 전원 살처분 당했을 텐데...
위리안치 圍籬安置 :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귀하貴下는 듣는 이를 높여 부르는 2인칭 대명사(라고 하)지만, 일상 대화에서 상대를 귀하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다 (내게 귀하라고 부르는 싱거운 친구 한 명 빼고는).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식당에서도 손님을 귀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강제 격리를 명령하는 통지문에다 말랑말랑하게 고객님, 선생님 하자니 위신이 안 서고... 고민하다, 상대를 적당히 긴장시키면서 법조 분위기에 어울리는 귀하를 2인칭으로 선택했으리라 짐작하는데 역시 적절한 호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말에서 2인칭의 사용이 애매해서 겪는 불편함이 적지 않다.
2인칭 중에 제일 간단한 '너'가 있지만 가족이나 조직의 아랫사람, 또는 친구 사이 정도에만 제한적으로 쓰인다. 대상에 따라 욕이 되기도 하는 위험한 인칭이다. 그 외 '당신'도 마찬가지로 잘못 쓰면 무례하게 들린다. '자기야', '그쪽' 같은 변종까지 생겼다. 궁여지책으로 '선생님', '사장님', '사모님', '이모님' 따위 왜곡된 존칭을 2인칭으로 대신하는 천박한 말 습관이 성행하고 있다.
사회가 발전하며 만나는 사람도 다양해지는데 수평 중립적인 관계에서 이인칭이나 이름의 사용이 금기시되고 있다. 대안으로 끌어들인 존칭이 범람하면서 말은 실속 없이 복잡해져만 간다. 사장님, 선생님도 조만간 존칭의 약발이 떨어질 터인데, 그때 가서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대안을 발굴해 낼지 궁금하다.
우리말에서 2인칭의 사용이 애매해서 겪는 불편함이 적지 않다.
불편하면 말을 안 하게 되고, 안 하는 말은 없어진다. 없으면 남의 것을 빌려 쓰게 되고.
어느 대기업에서는 임직원들끼리 직함 대신 이름의 알파벳 이니셜을 부른다고 한다.
효율 강박의 시대에 우리는 어째서 언어를 이리도 비경제적으로 사용할까?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대처 못하는 언어 사용자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연적인 언어의 변천을 기대하며 방치하면 악순환만 계속될 것이다.
언어에도 강제 처분이 필요할 때가 있다.
격리 명령 위반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
통지문은 격리 명령을 안 들으면 감옥에 보낸다는 경고로 이어졌다. 법령만으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벌칙을 구체적으로 늘어놓았다. 익숙한 문장이다.
요즘 흔히 보는 위반 경고문엔 얼마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한다는 문구가 으레 따라붙는데 이하라는 대목이 어색하다. 이하는 어떤 기준에 모자란다는 말이다. 길어야 징역 1년밖에 안되니까 여차하면 어겨도 된다는 얘긴가.
흉악 범죄를 제외한 대개의 형벌은 몇 년 이하처럼 상한선을 두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직접 제한하는 형벌이 극단적으로 중해지는 걸 막는 안전장치라고 생각한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지침이다.
하지만,
경고문은 법의 집행자가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법령 위반을 예방하는 취지의 통신이다. 굳이 이하라는 한정 조건을 붙여 징벌의 무게가 가볍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법은 맞는지 몰라도 맥락상으로는 비문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 지각하는 학생은 변소 청소를 일주일 이하 동안 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헷갈릴 거다.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동일한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대상과 의도에 따라 화법이 달라진다.
말 안 들으면 잡아 처넣겠다고 윽박질러서는 안 되지만, 위반 시 돌아올 불이익을 부각시켜 경각심을 유발하는 서술은 공익에 부합한다.
요즘 경고문이 관련 법조문에 있는 벌칙을 융통성 없이 그대로 인용하다 보니 좀 싱거워졌다.
많이 쓰는 벌칙 정보는 용도에 맞게 고쳤으면 좋겠다.
징역을 1년까지 살 수 있고, 벌금은 1천만 원까지 물 수도 있다.
우리 동네는 격리 명령에 이어 문자 메시지 몇 통을 연달아 보내고 나서는 잠잠하다.
'대우'가 예전만 못하다고 푸념했더니
친구가 도대체 뭘 바라는 거냐고 핀잔준다.
하루에 수십만 명씩 확진자가 생기면서 늘어난 중증 환자 돌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나 같이 경미한 환자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게 조심하는 게 최선의 도리일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