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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un 06. 2022

대화가 안 되는 나라

소통의 수직 질서

Photo by Antenna on Unsplash


미국의 정치 명문가인 케네디 가家에서는 아침 밥상의 화제가 신문 기사였다고 한다. 케네디(대통령) 형제는 자랄 때 뉴욕 타임스를 읽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간 식구들과의 토론에 낄 수가 없었다. 서양 사람들은 식사를 같이 하면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내공을 파악하는 훈련을 받으면서 자란다. 밥 깨작거리지 말라는 정도의 일방적인 밥상머리 교육만 받은 우리의 전통과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버지가 어설프게 식탁에서 사회성 훈련을 시도하다가는 밥상에서 퇴출될 수 있다.)


음식을 먹을 때 말을 삼가라는 식불언食不言은 서양과 상반된 우리의 전통 식사 예절이다. 말하다 입에서 음식이 튀어나올까 봐 그러는 거면 서양도 마찬가지다. 'Don’t talk with your mouth full.' (목적어+형용사 용법의 단골 예문). 그보다는 스님들 공양하듯이 밥 먹는 시간에는 좀 경건하자는 취지가 아니었나 싶다.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경시하고 침묵을 예찬하는 문화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 식사할 때 많은 대화를 한다. 버스 타고 식당으로 이동할 때부터 옆자리의 동료와 쉴 새 없이 얘기한다. 마음을 연 대화는 아닐지라도 생각을 전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특히 프랑스나 이태리 같은 라틴계 사람들은 서로 상대의 말을 끊어가며 떠든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마찰을 피해 가며 할 말 다 하는 재간이 있다. 위아래도 없다. 회식 자리에서 중역이 '나도 얘기 좀 하자'고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서양에서 만찬에 초대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부분이 긴 식사 시간과 끝없이 계속되는 대화다. 새벽 두 시까지 술잔은 기울여도, 한자리에서 와인 홀짝이며 맹숭맹숭하게 몇 시간을 버틸 이야기 밑천이 빈곤하다. 거래처와 얘기할 공통 화제를 발굴한다고 USA 투데이 같은 대중지의 스포츠 면을 열심히 뒤지던 주재원 동료가 생각이 난다.


할 얘기가 없어서 아니면 얘기가 하기 싫다고 해서 고개 숙이고 조용히 먹기만 하면 배가 무척 고프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사교적인 식탁에서는 음식이 아닌 대화에 집중하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식불언이 아닌 '식필언食必言'의 세상이 되었건만 우리는 아직도 맞대화가 불편하고 서툴다. 순발력도 지구력도 부족하다. 문화는 엄청난 관성을 가지고 있다.




사극을 보면 남의 집 (대개 양반집)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통 시대에 방문객이 주인을 찾는 절차인데 요즘으로 치면 아파트 현관에서 벨을 누르는 동작에 해당한다. 하인이 나오면 '어디 사는 아무개가 왔다고 여쭈어라'라는 호령이 떨어진다. 주인에게 자신의 출현을 전하라는 명령이지만 사실은 주인 들으라는 소리다. 하인이 없는 집에서도 가상의 하인을 중간에 두고 손님과 주인이 이런 식으로 통신했다고 해서 예전엔 코미디 소재가 되었다.


신하는 임금을 폐하陛下 또는 전하殿下라고 불렀다. 직역하면 폐하는 대궐 섬돌陛의 아래라는 뜻이고, 전하는 전각殿閣 (임금이 거처하는 집)의 아래가 된다. 일설에 의하면 신하가 감히 임금을 부르지 못해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사람을 대신 불렀는데 그 위치가 바로 섬돌 아래 (폐하) 또는 전각 아래 (전하)였다. 그러던 게 임금을 부르는 호칭으로 굳어졌다는 주장이다. 위에서 말한 '이리 오너라'와 같은 개념이다.


인간관계의 조화를 유지하는 게 사회생활의 중요한 목표가 되는 고 맥락 전통 사회에서는 상향으로 호출하거나 의견을 불쑥 내는 방식의 대화를 삼갔다. 자연히 윗사람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서 물어보고 명령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급자는 이에 응하고 답하는 소극적 응답의 틀에서 대화에 참여했다. 잘못 말했다간 꼬박꼬박 말대꾸한다는 핀잔을 먹으니 묵묵히 듣기만 하는 것도 안전한 소통 전략이었으리라. 최상의 전략은 아예 윗사람을 피하는 것이었을 터이고.


명령과 복종의 수직적 소통 질서가 잔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견을 제기하며 '토를 달아' 상사를 노엽게 만드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의견이 다르면 동시에 인격을 부정하는 꼴이 되니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한다. 이런 비민주적인 소통의 환경에서는 상향은 물론이고 수평 중립적인 관계와도 스스럼없는 대화가 결핍되고 따라서 기술도 열등할 수밖에 없다.




'당신 얻다 대고 반말이야 ', '뭐 당신? 너 이리 와봐...' 


정치인의 허술한 감정 표현이 정파 간 다툼으로 번진다. '사퇴하라', '정치 공세다.' 하는 유치한 공방 속에 한동안 정치가 질식한다. 소신이나 진영이 다른 정치인끼리 걸핏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상소리가 튀어나오는 이유도 대화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어휘를 동원해서 조근조근 대화로 분노를 표출하고 상대를 공략할 수 있는 훌륭한 언어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축구 선수가 기량이 부족하면 반칙과 폭력을 쓰듯이, 화자는 대화 기술이 부족하면 언성을 높이고 욕설질을 한다. 원색적 혐오 감정이 여과되지 않은 채 언어의 울타리를 타고 넘어와 대화를 교란시킨다.


기술이 부족하면 어렵고, 어려우면 기피하게 된다. 초대 대통령 때 비서만 몇 명 있었던 청와대 조직이 지금처럼 비대해진 원인 중엔 우리 사회의 대화 기피증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대통령은 대개 관련 비서관을 경유해서 정부 부처와 소통한다. 자신의 국정 철학을 이해한다고 믿어 직접 임명장을 준 장관과 전화통 들고 이야기하는 대신에 수하의 만만한 비서관을 시켜 의중을 전달하는 것이다. 비서실이 최고 결정권자의 참모인 동시에 전달자의 역할을 하다 보니 내각을 축소 복사한 이중의 조직이 된다.


상품은 유통 단계가 복잡하면 비용이 발생한다. 말은 거치는 데가 많으면 원본이 왜곡되는 배달사고가 일어난다. 비서관이 중간에서 대통령과 장관 사이에 안전거리를 확보해 줘서 대화로 인한 소통 사고는 예방해 주는 대신 국정의 신속한 판단과 정확한 조치엔 장애가 된다. 편한 맛은 있지만 '직접 화법'의 긴장감이 상실되는 것이다.


정부의 지도자나 그들의 입 역할을 한다는 대변인이 준비된 원고를 읽는 장면을 티브이에서 자주 본다. 지금 시대에 글은 데이터로 변환이 가능하다. 회의를 한다고 기껏 불러 모아 놓고  미리 작성한 원고를 읽고  그걸 다시 받아쓰는 복잡한 과정보다 원고를 카카오 톡으로 뿌리는 편이 백배 편하고, 빠르고, 또 정확하다. 글을 읽는 것은 대화가 아니고 낭독이다. 다자간 대화와 토론을 위해 모인 회의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걸로 확신한다. 실용적인 신세대가 이런 소모적인 관행을 놔둘 리가 없다.




대화가 빈곤하면 대화의 도구인 언어도 퇴화한다.

우리 시대의 빈곤한 대화와 언어의 퇴화가 서로 원인이자 결과로 악순환하고 있다.


논어의 맨 마지막 구절은 '말을 알지 못하면 남을 알 수가 없다'이다. 

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논어 요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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