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색한 2인칭
북한 당국이 오빠, 자기야 같이 우리 일상에서 유행하는 호칭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유입되는 남한 문화의 확산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경계를 강화하는 모양이다. 독재 권력은 언어를 입맛에 맞게 조작하고 통제한다. 하지만 말 몇 마디 못 쓰게 막는다고 자유를 향한 민중의 갈망을 잠재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북한 주민들이 친구나 배우자를 오빠, 자기야 라고 따라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 자유 대한의 번영과는 무관한 풍조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듣는 이를 부르는 이름과 2인칭 대명사의 쓰임이 옹색해서 (또는 옹색하게 만들어서) 생기는 언어문화의 퇴행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게 호칭이고 그중에 이름이 대표적인데 실상 막역한 친구나 집안의 어린 사람에게나 이름을 부른다. 그마저도 나이를 먹으면 조카든 제자든 함부로 이름 부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우리 사회에서 이름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보다는 사무적으로 구별하는 지칭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셈이다.
이름 대신 너라는 2인칭 대명사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쓰임이 하대下待 위주로 제한적이어서 잘못하면 낭패를 본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쌈 할 때 단골로 들리는 대사가 '너 얻다 대고 반말이야!'이다. 동시에 턱 끝 또는 검지가 힘차게 '너'의 얼굴을 향하며 격앙된 감정의 표현을 거들어 준다. 무례한 언사에 대한 반격을 너로 시작하는 건 그만큼 화력이 세다는 얘기다. 한 음절 짜리 인칭 대명사 너에 상대를 효과적으로 능멸할 수 있는 욕설의 기능이 있는 게 신기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찾은 안전(하다고 생각) 한 대안이 고작 직함과 가족 호칭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직함을 호칭 겸 존칭으로 끌어다 써서 상대방을 기쁘게 해 준다. 전직 현직을 막론하고 상대가 누렸던 생애 최고로 명예로운 직함을 발굴해서 대표, 장군, 차관, 교수 따위로 불러주는 게 미덕이자 사회 예절로 굳어졌다. 이름없이 직함만 불러야지 충성심의 순도가 올라간다, 끝에 님자는 꼭 붙이고. 식당 주인은 손님을, 군단장이건 회장이건, 사장님으로 퉁쳐버린다.
전통시대에도 양반들은 벼슬은 물론이고 일종의 공인 자격증인 고시 합격자의 신분까지 호칭으로 대용했다. 대감, 진사, 생원, 초시...
남명 조식의 비석 정면 중앙에 새긴 25자는 맨 밑의 본인 호와 성씨 포함 세 글자 '남명조南冥曺' 를 제외하고 모두 품계, 직장, 관직, 시호를 '홍보'하는 데 할애했다. 정작 남명의 이름 식植은 생략되었다. 조식은 생전에 벼슬을 거부한 선비로 유명한데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비석에 추증(사死후에 내린 품계) 받은 영의정 벼슬을 과시했다. 못 말린다.
한편,
명예보다 친밀도가 우선하는 사私적 관계에서는 가족 호칭이 동원된다. 직계 혈연을 가장하여 형님, 오빠가 된다. (혈족에 비유하므로 며느리나 사위는 없다.) 노인을 아버님, 할머니, 어르신으로 불러주는 걸 갸륵한 덕행으로 여긴다. 식당에 가서는 종업원을 언니 이모 같은 가족으로 편입시켜서 이것저것 귀찮게 하는 미안함을 상쇄시킨다. 이제는 반려견에도 인격을 부여해서 '아이'로 불러주며 사랑을 재확인한다.
우리 민족의 가족 호칭은 상호 간 촌수에 기반하고, 촌수는 유전자 근연도를 나타내는 과학적인 지수다. 같은 촌수라도 이모·고모처럼 모계와 부계에 따라 세분하고 있다. 가족 호칭은 서로의 관계에 걸맞은 규범을 객관적으로 설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가족 간 호칭이 분별없이 사회 호칭을 대신하는 현상은, 위에서 말한 불편한 이인칭 문제 외에도 모든 사람들과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 실현 불가능한 소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혈연을 친밀도의 최상급이라고 인식하는 상상력의 빈곤은, 가족이 모시지 못해 부모를 간병인에게 맡기면서 '가족같이 돌봐 달라'고 사정하는 앞뒤가 안 맞는 문법에서도 드러난다. 다면적인 현대 사회에서 가족관계를 표준으로 놓고 인간관계의 척도를 외곬으로 비교하는 것은 순진하다. 관계의 태생 그리고 그 성격에 따라 덕목별 기대치와 가중치가 다르다. 가족이기 때문에 실망이 크고 상처받는 경우도 흔하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란 말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을 짝퉁 가족으로 얼기설기 엮어봤자 약발은 전혀 안 듣는다. 가족적인 사랑의 공동체는커녕 국민들 간 대립의 골은 어느 때보다 깊다.
수평적 호칭의 수요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만만하게 사용할 범용의 2인칭이 빈곤해서 생기는 문제와 비용이 적지 않다.
사회적 관계에서 직함으로 호칭을 대신하는 건 낭비적이고 상하관계가 분명치 않은 경우 대화하기가 거북해진다 ( =말을 붙이기 싫어진다.). 또한 존칭의 남용으로 변별력이 흐려져서 점점 더 쎈 걸 찾는 존칭의 인플레를 초래한다.
사적 관계에 가족 호칭을 붙이는 건 실속 없는 기망일 뿐이고 언어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름과 2인칭 대명사의 기능을 되살리는 수밖에 없다.
사실상 비칭卑稱으로 추락해 버린 존칭 (홍길동) 씨氏의 사회적 위상을 강제로라도 복구시키면 너절한 존칭을 꽤 줄일 수 있다. 직급 없이 영어 이름만 부르기로 한 일부 기업의 사례는 보편화시키기 어렵고 왠지 (나는) 오글거린다.
너, 아니면 당신 같은 유사 호칭을 개발해서라도 중립적인 2인칭으로 소생시키면 대화가 간결해지고 전달력이 좋아진다.
우리말이 사회 변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사용자인 우리의 책임이다.
그동안 우리말을 가지고 먹고살면서도 우리말을 함부로 유린한 언론이 앞장서서 변화시켜야 온당하다. 하지만 획기적인 계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들이 시범적으로 동료 의원을 너라고 부르면 어떨까? 어차피 서로 막가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