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 남용
자가검사키트 구매가능합니다.
코로나 자가 검사 키트를 편의점에서도 팔 수 있게 허가한 작년 여름 어느 편의점 유리창에 붙은 광고다. 말을 참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구매購買는 두 글자 모두 사다는 뜻의 한자어다. 이어서 다른 한자어인 가능으로 구색을 맞춰서 구매 가능( 살 수 있다)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보통 회사나 기관에서 물건을 사들일 때 구매, 그런 일을 맡아하는 조직을 구매부라고 부른다. 사업용으로 필요한 물자를 산다라고 하는 게 좀 싱거워서 구매라는 용어를 쓴다고 짐작한다. 이것도 성이 안 차면 거창하게 조달調達이라는 말로 차별화하는 대기업이나 정부 기관도 있다. 영어에서도 격식 차릴 때 buy 대신 폼 나게 purchase를 쓰기도 한다. 과거 노르만 왕조가 잉글랜드를 지배할 때 궁중에서 썼다는 프랑스어의 흔적이다.
기업이 편의점에 와서 자가 키트를 대량으로 구매하지 않는다. 대개 동네 사람이 몇 개씩 산다. 그럼에도 굳이 구매라는 무서운 용어를 동원한 이유는 여러 사람에게 알리면서 그냥 살 수 있다라고 하자니 좀 '저렴'해 보여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편의점이 원래 저렴한 데 아닌가?
한자어는 뜻글자라 각이 지고 분명해서 단호한 장점이 있기는 하다. 기왕에 한자어를 쓰려면 (금연처럼) 구매 가능 네 글자로 끝내든지...
말은 계속 꼬인다
구매 가능합니다 에서 정작 구매의 주체는 편의점이 아닌 편의점 고객이다.
거래 상대방인 고객의 입장을 빌려서 편의점의 신제품을 에둘러 홍보하고 있다. 남편을 애 아빠라고 이르는 격이다. 규제 때문에 자가 검사 키트를 팔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팔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충정은 이해하지만 어법에도 방향감각이 필요하다.
자가 검사 키트 팝니다 또는 자가 검사 키트 있어요 하면 깔끔하고 명확하다. 네 글자가 줄어든다.
비록 사고파는 행위가 바꾸어 놓아도 성질의 변화가 없는 켤레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구매 가능 운운은 청소년의 음주나 흡연을 막기 위해 판매를 규제할 때나 쓰는 통제의 문법이다. 본의 아니게 오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 편의점에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담배 판매금지 안내문이 붙어있다.
금지는 행위를 못하게 함이다. 담배를 팔지 않는다가 아니고 담배를 팔지 말라고 하고 있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당국이 편의점을 상대로 단속하는 화법을 그대로 고객을 대상으로 인용했다, 담배 팔지 말라고. 역시 번지수가 좀 잘못되었다.
구매 가능 사례와 마찬가지로, 고유어 팔다 대신에 있어 보이는 판매라는 한자어를 선택했고, 거기에다 안 한다는 뜻의 한자어로 짝을 맞추는 과정에서 금지禁止라고 오역했다.
아래 오른쪽 안내문처럼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술 담배를 팔지 않습니다 가 무난하다.
편의점은 원래 쉽고 편리한 데 아닌가. 말도 편의점답게 쉽게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