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저
'이기적 유전자'는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에 발간해서 생물학계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서 큰 관심을 받은 과학 교양서적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한 단계 발전시켜 유전자 중심의 진화 이론을 대중적으로 알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경쟁이 생명체의 진화를 이끌어낸다는 흥미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논란도 많은 책이다. 모든 동물(인간 포함) 행동의 동기를 이기심으로 몰아가는 시도에 대해 불편해 한다. 동물 행동의 복잡성을 한마디로 명쾌하게 풀어준 건 그럴듯하지만, 유전자 수준으로 단순하게 정리하는 건 좀 지나치다는 얘기다.
복잡한 개념을 직관적인 비유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시를 통해 설명하면서 진화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전략을 조정漕艇 선수의 팀워크에 비유한 건 기발 나다. 하지만 사자와 영양이 한쪽은 식량을 얻기 위해 쫓고, 다른 한쪽은 근육과 장기를 지키기 위해 쫓긴다는 예시는 차가운 관전평이다. (Lion for food / Antelope for muscle and organs) 마치 잔인한 영국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 책을 보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도 십수 년 전에 사서 몇 페이지 읽다 집어던졌었다. 이번에 독서 동아리에서 이 책을 선택했기에 다시 찾아 읽으면서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다.
이거 내 얘기 아냐
'이기적 selfish'으로 시작하는 제목이 도발적이다. 저자는, '제 말은 그래야 된다는 게 아니고요 사실이 그렇다는 거라고요'라고 계속 강조한다. 즉 사회적 가치 판단이 아닌 생물학적 불편한 진실이라는 얘기.
도킨스는 인간의 행동을 유전자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했다. 사랑, 애국심과 같은 이타적인 행동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다. 이타심의 끝판왕인 모성애도 따지고 보면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위해 시킨 거라는 논리에 정나미 떨어진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한다는 뜻의 '이기利己'심은 악이 아니고 가치중립적인 생물체의 본능이다. 다만 과도한 이기심이 문제다. 콜레스테롤이 동물의 세포막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성분이지만 수치가 높으면 동맥경화를 촉진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아니고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관점이다. 생명체 안에 들어앉아있는 유전자를 타자화해서 이기적이라고 수식하는데도, 지금 내 얘기 하나? 하는 자격지심에서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도킨스는 개정판 서문에서 책 제목을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불멸의 유전자'라고 할 걸 그랬다고 했는데, 그랬으면 책이 이만큼 팔렸을까? 노이즈 마케팅도 이 책의 인기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람을 뭘로 보고
인간의 심리와 행동 방식을 줄곧 유전자 단위의 이기적 생존 이론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본능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있고, 나 같이 그러려니 생각한 사람은 신기하다
유전자가 생체 번식의 수단인 줄 알았는데 거꾸로 생체가 유전자의 도구라는 파격적인 역설이 부정적인 반응을 유발하기도 한다. 알고 보니 유전자가 갑이었다네그려.
인간은 (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복제 기계 survival machines-robot vehicles 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유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판단 능력을 폄하하고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윤리적 지적을 야기한다.
인간의 본성이 유전자에 조종되는 이기심이라는 개념은, '하늘이 하늘의 본성(天道)을 만물에게 부여해 준 것을 본성(本性)이라고 함 天命之謂性'의 중용 1장과도 충돌한다.
그러나 책은 말미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독재를 인간의 자유의지와 문명을 통해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안심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 주장한 유전자 행동 방식에 충실할 때 생기는 사회 작동의 공백을 우리 인간은 경로/효/이타/희생 같은 윤리와 도덕으로 보상해오지 않았던가.
사회적 악을 정당화하네
도킨스는 동물을 주어로 놓고 얘기를 풀어가지만 거의가 사람에게도 해당되고 사회 현상으로 연결된다.
빈곤, 기아, 전쟁과 같은 사회적 악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유전자의 이기적인 본성 탓으로 돌리면서 불가피하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불안과 무력감을 느낀다.
설사 이타적인 유전자가 생겨나도 이를 악용하는 이기적 유전자 등쌀에 견뎌나지 못하고 박멸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에 좌절한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유전자를 가진 개인이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빙자해서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다.
도킨스는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에 대한 경쟁을 인간 사회와 비교하기는 했지만, 그의 주요 목표는 생물학적 이론을 설명하고 진화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었다. 도덕적 주제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불평등은 개인의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경제 시스템에 의해 생겨난다.
감히 이과가 문과를, 거기다 종교까지 건드려
도킨스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복제를 통해 생존하는 유전자의 자연선택에 비유했다. 공자의 논어 같은 수천 년 전의 사상이 오늘날까지 인용되는 이유는 오랜 세월 생존할 만큼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올해 발행되는 전 세계 책들 중에 2500년 후에까지 살아남아 읽힐 만큼 경쟁력 있는 책이 한 권이라도 있을까?
그런데 이 비유를 오해하면 생물학이 감히 사회과학을 아랫길로 본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저자는 한 술 더 떠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라고 했다. 안 그래도 다윈의 진화론으로 기독교계의 심기가 불편하다. 도킨스는 급기야 다른 책에서 종교를 바이러스에 비유했다.
종교적 신념과 상반된 과학 이론이 제시될 때 종교 공동체의 부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많다, 지동설로부터 빅뱅 이론까지.
'과학과 종교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과학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언제 종교와 과학이 타협하는 거 본 적 있는가?
초장부터 골 아픈 분자 생물학
책의 앞부분에 염색체, DNA, 유전자 따위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이 나온다.
저자가 주장하는 유전자 중심 진화 이론을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유전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기본 개념을 미리 한 자락 깔아놓았다. 도킨스의 이론이라기보다 상식에 해당한다.
재미있으라고 썼다는 일반 서적에 골치 아픈 분자 생물학이 튀어나오니까 책을 접게 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전자와 유전적 프로세스는 거의가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나오는 수준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여기저기 마우스 품을 팔아서 검색의 호수에서 건진 정보 중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건 고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EBS의 생명과학 인터넷 강의였다. DNA 복제 편 시간이었는데 대입 준비 학생들을 상대로 해서 그런지 설명이 상당히 체계적( ≠정신없이 )이었다. 인터넷 강의 선생님이 분필로 꼭꼭 눌러 중요한 거에 별 표시해 가며 시험에 나온다고 강조하는데 내게는 꼭 알아야 하는 상식으로 들렸다.
고등학교 때 가르쳐 주는 것만 알아도 복잡한 백신 방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나는 이번에 mRNA 검색을 계기로 우리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양과 상식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세상을 '유식하게'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등 과정의 가치를 새삼 깨닫는다. 내가 아는 MIT 대 공학박사 출신 경영자가 취미로 공통수학의 정석을 읽는 것도 이해가 갔다.
'고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력을 줄인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야지 (검정고시 출신 빼고) 대학도 가고 대학원도 간다. 하지만 통용되는 고졸의 뜻은 대학에 못 가고 고등학교만 졸업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고등高等이란 이름이 민구(면구)스럽다. 요즘처럼 명칭 바꾸기 좋아하는 세태에서 그냥 놔두는 게 이상하다. 고졸을 비하하는 건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비하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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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는 대학에 가는 진학생보다 이제 더 이상의 정규 교육 기회가 없는 취업반이 더 철저히 배워서 학교 문을 나서야 한다.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은 대학 측에서 여러 방식으로 수학 능력을 평가한다. 사회로 진출하는 학생은 배출하는 고등학교에서 교과과정의 이해 정도를 측정하고 내보내는 게 이상적이다. 졸업시험이 필요한 이유다. 사회에서 졸업 자격을 공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자연히 졸업시험을 통과한 '고졸'에 대한 인식도 바뀔 것이다.
과거 필자의 브런치 글 중에서
이 책을 '보면' 화가 날지 몰라도, 이 책을 다 '읽으면' 오히려 차분해진다.
모든 인간은 유전자를 다소 공유하며 나무의 가지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유전자의 번식과 경쟁이라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은 잠시 스쳐갈 뿐이다.
두 개의 인디언 격언이 겹쳐진다.
미국 인디언 : 미타쿠예 오야신 :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진짜 인디언 : 에크 딘 삽 코 자나 헤 : 우리 모두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표지 사진 © warrenumoh,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