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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an 30. 2024

운전수와 선수

직업 명칭 바꿔치기 

버스외부광고    /       버스기사 채용 박람회       /       일본 '버스 운전수' 모집 광고


'승무사원 모집'이라는 버스 외부 광고를 보고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하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버스 운전사를 뽑는 거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운전직의 명칭이 오래 전의 운전수手에서 운전사로, 다시 운전기사技士로 바뀌어왔다. 기사식당은 주로 운전사들이 이용하는 곳이 되었다. 운전기사가 다시 승무사원으로 변하는 모양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미 '운전수'는 ‘운전사’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운전기사'는 '운전사'를 높여 이르는 말로 못을 박아 놓았다. 다시 말해서 운전수手 <  운전사士 < 운전기사技士 의 차례로 운전하는 직업의 격이 올라간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버스 운전사 모집공고에 아직 운전수라고 쓰고 있다. 


운전수 말고도 가수, 투수같이 수手로 끝나는 직업들이 있다. 일반화는 어렵지만,  - 수手 접미사가 가수 선수에서는 타고난 솜씨에 초점을 뒀고, 투수나 조타수에서는 맡고 있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 짐작한다. 누가 앞으로 국가대표 선수選手는 특별히 선사選士로 대우해 주자고 하면 웃기는 얘기가 된다. 


한편 변호사 조종사처럼 공인 자격이 필요한 직종은 대개 선비 사士자로 끝난다. 학사, 박사  학위에도 사士가 붙는다. 기사技士는 법에 의거한 기술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조종기사로 불리기를 원하는 비행기 조종사는 없을 것 같다. 


조종사는 비행기를 모는 사람이고, 여객기에서 손님을 상대하는 스튜어디스나 스튜어드를 승무원이라고 한다. 누가 생각해 냈는지 모르지만 운전사를 승무사원이라고 부른다고 그들의 지위가 올라가지는 않는다.  좀 그럴듯해 보여도 그때뿐이다. 나 같은 사람을 혼란시킬 뿐이다.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로 유명한 주요섭이 쓴 수필 '미운 간호부'가 있다. 육체노동을 연상시키는 간호부看護婦를 간호원員으로 부른 지 오래다. 간호원이 이제 간호사看護師로 다시 바뀌었다.  


진료를 돕는 간호 업무의 특성상 형성된 의사와의 수직적인 관계에 균형을 맞춰보려고 원員 대신에 사師를 붙였다고 생각한다. 간호원員 간호사師로 갈아탔지만,  국회의원員 명칭에 전혀 불만이 없다. 의원議員 소리 들으려고 별 짓 다하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장애자 할 때 '자者'에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서 장애인人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한편, 같은 '자者'가 붙은 직업의 기자者 학자者 명칭에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른바 선망하는 '사' 자 직업도 한자로는 제각각이다. 판·검사 사事, 변호사 사士, 의사 사師가 붙는다그 밖에도 '' 자가 들어가는 직업(직급) 은 다양하다. 집사執事, 이사理事, 감정평가사評價士, 병아리 감별사鑑別師, 요리사料理師, 미용사美容師... 노름을 직업으로 하는 도박사師도 ''자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업 이름에 흔히 수手, 사士, 사師, 사事, 원員, 관官, 자者  그리고 지금은 잘 안 쓰는 부夫나 부婦따위를 붙인다. 다스리는 자리엔 사事,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도와주는 일엔 사師, 조직에 소속되어서 한자리에서 일하는 직업엔 원員을 붙인다고들 하지만 일관성도 규정도 없다. 




판·검사는 일제시대 이래 명칭이 그대로다. 명예롭고 권위있는 직업의 명칭을 건드릴 이유가 없고 오히려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같은 직함으로 불리면 기뻐한다. 


반면에, 하는 일에 비해 처우가 빈약하거나 사회의 평가가 절하되었다고 여기는 우편배달부, 장수 (상인) , 운전수, 간호부, 광부 같은 직종은 명칭이 계속 진화했다. 동시에 변경 전 명칭은 외면하고 동정해야 할 이름으로 금기시되어 퇴화한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거의가 'ㅜ '모음 돌림이다, 배우優 성우를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인식되고 있는 직종의 명칭을 조금 전문성 있게 치장해서 사회적 지위를 보상해 주는 시도는 하지만 해당 직업인들을 위로해 주는 수준에 머무른다. 


앞에서 열거한 사례에서 확인했듯이 각종 직업형 접미사와 직업 성격 사이의 연관성이 희박해졌고, 직업의 권위와는 더더욱 무관하다. 


그리고 고작 명칭 끝에 한두 자 갈아 끼워놓고 직업의 인식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는 심리는 안일하고 어리숙하다. 수시로 이름을 바꿔대는 우리나라 정당을 봐도 그렇다. 포장보다 알맹이의 변화가 먼저다. 




그리고 하늘이 백성을 내시고 이를 나누어 사민(四民)을 삼으셨으니,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각 자기의 분수가 있습니다. 선비[士]는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고, 농부[農]는 농사에 힘쓰며, 공장(工匠)은 공예(工藝)를 맡고, 상인(商人)은 물화(物貨)의 유무(有無)를 상통(相通)시키는 것이니, 뒤섞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종 13년 4월 15일 / 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동아시아 3국은  왕조 시대에 백성의 직업이 바로 신분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한 명분은 사회 분업이었는지 모르지만 실상은 계급을 차별하는 기준이었다. 정부 관리가 으뜸이고 농부, 물건 만드는 공장(工匠), 상인의 순서다. 


우리 사회에서 사농공상의 서열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지만 지금 시대에도 직업에 대한 계층 의식은 여전하고 단계는 세분화되었다. 부富와 귀貴를 보장하는 직업을 선호하고 그 직업에 연관된 대학 학과의 입학 경쟁이 치열하다. 권력과 재력이 서로 호환되는 세상이라 귀貴와 부富 둘 중 한 분야에서만 성공하면 가문의 영광이다. '너거 아부지 모 하시노' 하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영어에도 몇 가지 직업형 어미가 있다. 대개 teacher, baker 처럼 동사에 -er을 붙여 쓰는데,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이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는 -or로 끝내기도 한다 (예: doctor, actor). 어떤 분야의 전문가에게는 artist, scientist 처럼 -ist 가 오는 경우도 있다. 직업의 성격과는 관계가 있으나 위상은 중립적이라는 점과, 직업형 어미가 단어에 포함되어 있어 어미를 바꿀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 


이러한  문화적, 문법적 차이는 동서양의 직업에 대한 관점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학문과 공직을 중시해서 시험을 통해 선발된 관료나 학자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 유교 문화권과, 개인의 능력과 성취를 중요시해서 특정 직업 자체보다는 개인의 성공 여부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서양의 가치관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요리사料理師는 '셰프'라고 불러줘야  대접하는 게 되고, 장애인人을 다시 장애우友라고 부르자는 사람도 생겼다. 


바탕보다 꾸밈이 앞서는 우리 사회에서 소모적인 명칭 돌려 막기 관행은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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