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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07. 2020

코로나가 경조사까지 바꾸고 있다.

황순원의 단편 소설 소나기에는 소년의 아버지가 윤 초시 댁 제사상에 올리라고 암탉 한 마리를 가져가는 장면이 나온다. 격식을 따지던 전통 사회에서 관혼상제는 적잖이 부담이 되었다. 서로 품앗이하여 일손이라도 거들며 이웃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공동체의 지혜였다. 친지의 애경사를 서로 축하하고 애도하던 미풍양속이 이제 와서는 허례로 변질되어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좋은 음식이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식이다.




예전엔 일가친척이나 동네 사람들과 같이 큰 일을 치렀는데, 지금은 그 범위가 혼주나 상주의 혈연 외에도 학연, 직연 등 사회관계로 확대되었다.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된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허세를 부리게 된다. 다른 집안에 꿀리기 싫어서 행사의 규모를 키우고, 그 비용을 대기 위해 청첩장과 부고를 남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예식의 목적은 실종되고 예식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간혹 행세깨나 하는 혼주가 무차별적으로 청첩장을 살포하는 바람에 식장 주변에 차가 막히고, 식장 입구서부터 봉투를 들고 길게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을 본다. 식장은 도떼기시장처럼 북적이는데 혼주는 자신이 '잘 못 살지는 않았음'을 공인받은 양 슬그머니 안도한다. 정작 혼례를 치르는 주인공과 일면식도 없는 대부분의 하객들은 봉투와 식권을 교환하기 바쁘게 피로연장으로 직행한다. 이제는 거의 외울 만큼 익숙한 메뉴의 뷔페로 한 끼를 해치우고 식장을 총총히 빠져나간다. 접수대 옆에서 혼주 부부에게 눈도장 찍을 때 그 옆에 삐죽하게 서 있었던 게 신랑인지 아닌지... 상관없다.


결혼식에 혼주의 친구, 직장 동료, 모임 회원, 거래처까지 총망라하여 부르고 비용을 부조금으로 충당하는 행사 비즈니스 모델은 후진적이다. 그렇게 실용적이며 구세대의 허식에 진절머리 치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지네들 일은 왜 이렇게 놔두는지 알 수가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부모 친구들로부터 갹출한 돈으로 떡 벌어지게 치른 예식에 주인공들은 얼마나 만족할까? 


일부 비용을 부모가 대주더라도, 결혼식은 주인공인 신랑, 색시 위주로 치러야 의미가 있다. 예비 신혼부부가 주도해서 예산을 잡고 거품을 없애면 자연히 주인공 중심의 행사가 된다. 예산이 여의치 않으면 초대할 하객 중 부모 지인을 우선적으로 자를 것이고 자연히 신랑 신부가 아는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서양처럼 꼭 와야 할 하객들만이 초대돼서 신랑과 신부를 둘러싸고 밤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는 축제가 된다. 부조금 심부름 온 아버지 회사 하청업체 직원은 낄 자리가 없다. '꼭 와야 할 사람'이란 와서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하루 종일 같이 보낼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봉투만 던져놓고 빠져나가는 의무 방어전 선수와는 다르다. 초대받은 '소수 정예' 하객은 파티 복장을 걱정할지언정 부조금의 액수를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장인 장모 상도 친부모 상과 동격이 되면서 문상의 빈도수가 두 배로 늘었다.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면 당연히 사월 초파일 날도 놀아야겠지... 문상을 와서 자연스레 학교 동창이나 회사 오비 번개 모임을 하기도 한다. 서열이 좀 높은 인사가 뜬다는 기별이라도 오면 순간 빈소가 술렁이며 수하들은 엉거주춤 귀하신 분의 동선을 무전으로 수시 확인하며 부산을 떤다. 문상은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함인데 현장에선 문상객이 갑이다. 밀려드는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상주에게 위로의 말씀은 중얼중얼 증발된다. 인사치레로 고인의 근간 행적을 일 분에 걸쳐 건성으로 요약보고를 받은 다음, 화제는 즉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LA에 갔을 때 신세 지고 온 친구의 근황을 전하거나, 얼마 전 아들을 의대에 들여보낸 의대-아버지를 축하하며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박장 대소가 터지기도 한다. 대박 난 식당의 주인처럼 상기되어 이 자리 저 자리를 누비는 상주의 표정은 혼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상집에서 오열하는 장면은 테레비 뉴스에서나 본다. 오로지 사진틀 안에 갇혀있는 고인만 조용하다. 말 그대로 주객이 바뀌었다.


많은 이들이 와서 고인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상심한 유족들과 함께 밤을 새워주는 풍속은 우리의 좋은 전통이었다. 대갓집에 상이라도 나면 부엌을 장악한 동네 아낙들이 자기 애들 입에 삶은 돼지고기 첨이라도 썰어 넣어주는 동네잔치가 되었다. 그래도 거기 모인 문상객들은 고인의 피붙이 이거나, 한 동네 지근거리에서 평생 같이 농사 지며 살아온 친족, 이웃이자 '직장 동료'였다. 고인 살아생전에 신세 진 일, 서운했던 일을 추억하면서 밤이 깊어갔다. 


그런데 (정말로) 생전 보지도 못한 거래처 직원 부인의 아버지 (그것도 방금 장례식장 전광판에서 확인한 )라는 인연만으로는 고인을 애도하고 그 사위의 슬픔을 위로하는 말이 어색하고 궁색하다. 알면서 안 들여다보면 나중에 면목이 없어서, 지난번 작은 애 결혼식 때 왔다 간 상호주의 때문에, 복잡한 퇴근 시간에 집과 반대 방향으로 두 시간을 운전해서 가는 건 너무 형식이고 너무 낭비다. 

우리의 빈소 위주 문상 문화는 장례식 참석 위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오래전에 모 대학병원에서 시도하다 포기한 입식 빈소 운영이 답이다. 가까운 친족을 제외하고는 고인 영정 앞에 예를 표한 다음에 빈소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단언컨대 왜 육개장도 안 주고 쫓아내냐고 투덜거릴 문상객은 거의 없다. 진정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차분하게 고인의 삶을 회고하고 서로 위로하면 된다. 상주 측은 빈소를 숙연하고 청결하게 운영하면서 불필요한 경비도 줄일 수 있다. 부조금은 자연히 줄어든다. 


장례사업은 병원의 주요 수익사업이라고 한다. 장례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사업 자체를 포기하면 병원 수익에 차질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위하여 병원도 양보해야 한다. 생산 공장에서 일관 공정은 효율적이지만, 병원에서 운영하는 장례사업은 마치 환자와 망자가 한 프로세스로 이어져 있는 망측한 상상을 하게 한다. 병원의 사업은 환자를 치료하는 선에서 마감을 하고, 치료에 실패하여 사망한 환자는 전문가들이 다른 장소에서 모시도록 내어드리는 게 덜 민망할 것 같다.




서양에서 근무할 때 현지 직원들에게 부조를 얼마나 해야 할까 물어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알아서... ( upto you)'였다. 지당한 대답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조하는 사람의 사정보다는 관계의 질에 따라 몇 단계 정액제로 부조금 시세가 형성된다. 나아가서 부조금의 액수로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체면과 형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며 고민한다. 부조는 도움에 속하고 도움은 내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성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랬다. 경조사에 필요한 인력을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없었던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거드는 품앗이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연히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노동이 제공되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가정 행사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갖 공동체가 참여해서 계契를 붇는 방식은 불편하다. 이렇게 해서 '확보'한 하객이나 문상객은 실상 계원들에 지나지 않고 예식은 계모임이 되어 버린다. 한편 부조금이 뇌물을 바치는 통로로 악용되기도 한다. 이미 상부상조의 차원을 넘어 거래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


사회 활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경조사의 부담을 주고받는 악순환의 고리에 걸려있다. 부조금과 참례 시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민은 소소하지만 빈도수를 감안할 때 총량적으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다. 이제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 가정사에 왕래하지 않고도 훈훈한 인간관계 유지하는 길은 많다. 남의 도움 없이 일을 치를 수 있는 힘 있고 잘 사는 사람들부터 바꾸어 나가야 한다. 안 부르고 안 받고 간소하게, 하지만 알차게 가족행사를 가족 위주로 바꾸어나가자. 좀 허전하다고? 얼굴만 디밀러 온 백 명과 진심으로 위로하러 온 열 명 중에 어느 쪽이 더 공허하고 어느 쪽이 더 실속 있나?


그리고 설사 청첩을 받고 마지못해 결혼식에 갔더라도 기왕이면 하객답게 행동하자. 식당으로 직행하지 말고 잠깐이래도 식장에 들어가 진심으로 축복해 주자. 거래처 장인상에 문상을 갔더라도 친한 친구 어머니를 애도하듯 명복을 빌어드리자. 억지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숨기자. 안 그러면 저만 비참해진다.


경조사도 코로나를 비껴가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하객 없는 결혼식을 하느니 결혼식 연기를 택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당사자들의 고뇌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장례식은 연기할 수 도 없을 텐데 부고가 뜸해졌다. 코로나가 경조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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