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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22. 2020

마이 네임이 초이라고요?

이따위로 말하면 우리말 오백 년도 못 간다


외국인과 통성명할 때 자기 이름을 '초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흔한 성씨인 최崔를 '초이'로 불러달라는 것이다. 추측하건대 '최'를 알파벳으로 옮길 때 단모음 를 파자破字하여 알파벳OI 로 나누어서 CHOI 라고 써놓으니까, 읽는 사람은 당연히'O'와 'I'를 따로 발음하여 초이가 되었을 터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한국 사람이 그 틀린 발음을 역수입해 발음조차도 웃기는 초이라고 자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류를 흉내 내어 자기의 성을 '가는' 어리석음이다. 마치 아이에게 '맘마 머고또' (밥 먹었어) 하고 물어보는 식이다. 김연아를 유나킴이라 불러도 되레 재미있어하고 삼성이 삼숭, 현대는 하윤다이로 불려도 그러려니 한다.


어차피 외국어로 표기된 우리말을 완벽하게 발음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외국인 화자가 원래 발음에 근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은 이 'ㅚ'에 해당하는 발음을 정확하게 한다, 제대로만 가르쳐주면 ( '뵙다' 할 때 그 'ㅚ'발음). 되레 우리나라 사람들이 요사이 단모음 'ㅚ'를 복모음 'ㅞ'로 틀리게 발음하곤 한다 ( 최를 쵀로, 퇴사를 퉤사로 ). 




외국인의 실수마저도 관대하게 받아주고 따라 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건 오랫동안 젖어온 우리 민족의 문화 사대에 연유한다. 예로부터 중국은 우리 정치, 문화의 독보적인 종주국이자 압도적인 블랙홀이었다. 새로운 문물은 거의 중국으로부터 또는 중국을 거쳐서 중국 문자인 한문에 실려서 밀려 들어왔다. 새로운 개념과 사물을 표현할 우리말도 없었겠지만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한국어의 어휘사는 한자어가 고유어를 축출해온 과정이다. : 감염된 언어, 고종석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그 문화를 담아내는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 나라의 언어는 담아낼 문화가 있어야 존재한다. 문화를 담아내는 작업의 수요가 빈곤했던 우리 언어는 성장을 멈추고 그 양과 질에서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우리 민족은 빚내서 쇠고기 사 먹듯이 과도하게 한문을 차용하여 주요 개념 (특히 추상적인 )을 표현해왔다. 그러면서 우리말의 어휘는 문화와 함께 동반 퇴보하는 악순환을 겪다가 한자어를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말의 '본다'라는 뜻으로 볼 시視, 볼 견見, 볼 관觀 따위 세 개의 한자를 꼽을 수 있는데 뜻이 조금씩 다르다. 영어 번역을 보면 개념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한문, 영문에서는 구별하는 동사를 우리말은 같이 쓰고 있다. 영어에서 이모와 고모, 숙모 외숙모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다양한 개념의 구별을 외국어에 의존해온 대가로 우리말은 일부 어휘적 색약色弱이 되었다.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다. 온 나라 사람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고 해도 안 될 이치가 없다. 그런 연후에야 ‘이(夷·오랑캐)’라는 한 글자를 면할 수 있고 수천 리 동국(東國·조선)에 저절로 주·한·당·송의 기풍이 나타날 것이다. 이 어찌 크게 상쾌한 일이 아닌가. :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의 책 '북학의'

박제가의 글에서 우리말을 저급하게 여긴 조선말 식자층의 문화적 열등감을 알 수 있다. 문화 사대는 자기 과시로 연결된다. 과거 봉건 시대 한문은 지배계층인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아래 인용에서 '중국 말'을 '영어'로 바꾸어 놓으면 우리나라의 지금 상황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소비하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지적 신분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한문과 영어가 충족시켜 왔다.

언어는 이원화되어있고 교육받은 계층은 중국 말을 가능한 모든 대화에 끼어 넣으며 조선국 글자인 언문은 식자층에서는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알파벳을 보유하고 있다. : 110년 전 우리나라에 온 버나드 비숍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수년 전에 어느 외국어 전공 대학교수가 우리말이 타 언어에 비해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푸념하는 걸 듣고 기가 막혔던 적이 있다. 소위 언어를 전공했다고 하는 학자로서 우리말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해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걸까? 외국어 몇 가지를 기준으로 비교해 보고 우리말을 폄훼하는 것은, 포크와 나이프로 먹기 불편하다고 한국 음식 탓하는 것과 같다. 인종에 우열이 없듯이 언어의 본질에도 우열은 없다. 각 언어는 자연조건과 사회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기도 하고 퇴화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언어와 교류하며 어휘나 어법이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 사람으로 치면 후천적인 문제다. 사용자의 책임이란 얘기다.



우리말의 퇴보는 계속되고 있다. 이제 한문의 자리에 영어가 들어앉아 우리말을 계속 밀어내고 오염시키고 있다. 요새 같은 글로벌 시대에 꼭 우리말과 문화만 고집할 필요 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자진해서 자기 성을 '초이'로 바꾸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문제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같은 자발적 언어 차용국의 말로는 자명하다. 빌려온 문화는 갚을 수가 없다. 문화적 채무는 나라를 담보로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나중에는 담보로 맡긴 나라를 통째로 압류당하기도 한다. 서구의 어느 미래학자가 예언하기를 아시아에서 500년 후에도 살아남을 언어로 중국어가 유일하고 일본어는 그 경계에 있다고 했다.





http://www.unesco.org/new/en/culture/themes/endangered-languages/language-vitality/


유네스코에서 언어의 생존 가능성을 평가하는 9개 요소 중에 공동체 구성원의 자기 언어에 대한 태도와, 정부와 제도의 언어에 대한 태도와 정책이 있다. 이 두 기준만 보면 우리말은 얼마 못 가 사라진다. 아니 자살한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중국 네이멍구 ( 내몽골) 자치구 교육청이 이번 가을학기부터 몽골어 사용을 줄이고 중국어 사용을 늘린다고 한다고 해서 시민들이 문화 학살을 중단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 경우는 타살이다.


말이 없어지면 대수냐고?!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건 사용자뿐 아니라 인류에도 불행한 일이다. 그 언어가 담을 수 있는 문화도 같이 사라지고, 세상은 문화 다양성에서 또 하나의 손실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앞을 내다보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교육계와 언론, 정부가 위기의식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말 500 년도 못 가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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