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위로 말하면 우리말 오백 년도 못 간다.
하늘 천天 따지地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기초 한자 천千자로 되어있어 옛날엔 어린아이들이 한문을 시작하는 교재였다고 한다. '하늘'은 우리 고유어고 '천天'은 한자다. 그런데 같은 천자문에 있는 '사史'는 사기 사, '백百'은 일백 백이다. 한자의 뜻을 다시 한자를 통해서만 이해해야 하는 '순환 참조'의 오류가 발생한다. 사물의 본질을 깨달으라고 한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와는 다른 이유의 반복이다. '백百'은 '온'처럼 순 우리말이 있었지만 자주 쓰지 않아서, 사史는 우리말에 없는 역사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낱말을 새로 만들지 않고 편한 맛에, 한자를 그대로 가져다 썼을 것 같은데 비전문가인 나의 추측이다.
한자어 단어는 더 그렇다. '이치理致'를 다음 한국어에서 검색해보면 '사물의 정당하고 당연한 조리,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로 나온다. 보조사를 빼고는 모두 한자어다. 다시 말해 순 우리말로는 이치라는 개념을 표현할 수 없다는 거다. '백百'에 밀려 '온'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도태된 이유는 멀리 갈 것 없이 지금 이틀 사흘 대신에 발음도 헷갈리는 이일 삼일을 더 쓰는 걸 보면 된다. 마구 외국어를 들여오면서 있는 말마저도 외국어로 바꾸어 쓰는 습관은 지금도 여전하다, '숟가락'을 '스푼'이라고 부르듯이.
한자는 글자마다 뜻이 있어 길고 복잡한 의미를 간단하게 줄여서 표현할 수 있는 뜻글자다. 한자로 구성한 한자어 단어는 각 글자의 뜻이 살아있어야 제 기능을 한다. 그러나 요즘 한자의 뜻 일부가 실종되거나 쓰임이 왜곡된 한자어 단어의 용례가 많다. '의리義理'를 보고 언뜻 조폭을 연상하는 건 나만의 문제일까? 의리의 원래 의미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로서 마초macho 사이의 우정과는 거리가 있다. '부귀富貴'는 부와 귀가 조합된 표현으로서 돈이 많고富 지위가 높음貴을 의미하는데 요새는 대개 돈이 많은 부자를 가리키지 지위가 높은 고관에게는 잘 안 붙인다. 반대로 빈천貧賤도 그렇다. 그러려면 그냥 부富만 쓰던지... 부와 귀가 호환되는 세상이라 그런가? 순 우리말이 아니다 보니 말의 어원도 짐작이 안되어서 용례가 줏대 없이 시대에 따라 왔다갔다 한다.
중국 수내부 [수뇌부] / 쇠뇌[세뇌]가 된 애들 / 난위[난이]도 낮은 곳으로 셀렉 / 언론계혁[개혁] / 국정의 남[난]맥상 따위 웃기는 예는 댓글을 검색하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맞춤법의 문제가 아니다. 한자어 단어에서 각 한자의 뜻은 뿌리가 되는데 뿌리를 잃고 줄기와 잎새만 남으니 발음마저 마구 흔들린다. 한자를 빌려와서 표현하면서 정작 글자에 대한 뜻은 흐려지고 생경하게 표피적인 의미와 소리만 남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 글의 제목 '왜승모가 높아심에'는 소셜 미디어에서 본 우스개 사례인데, 안타깝지만 지어낸 얘기 같지는 않다. 우리말을 보충해서 풍부하게 만들어 줘야 할 외래어가 분별없는 도입과 사후관리 부족으로 도리어 우리말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삼국시대 전부터 우리말에 수천 년간 깊숙이 뿌리내린 한자어는, 관념어와 학술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제 우리말 어휘의 핵심 부분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와서 우리말로 돌려놓으려 해도 갑자기 대체할 고유어의 '재고'도 충분하지 않아 표현의 공백이 생긴다. '어차피 於此彼'를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로 바꾸자고 하면 어차피 누가 들은 척이나 하겠는가? 한자어의 사용은 현 수준을 넘지 않는 한도에서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쳐서 기왕 고생하며 쓰는 한자어 단어 제대로 알고 쓰게 하자. 'やすい 安い' (싸다)처럼 한자어 단어의 상당 부분을 고유어로 읽는 (훈독訓讀) 일본과 달리 우리는 한자음의 뜻을 새기지 않고 그대로 읽는 방식이어서 더욱더 한자를 알아야 한다. 한자를 모르는 아이에게 '왜승모 높아심'이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변화變化'는 (학교에서 화학실험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수천 년 전에 동양에서 수립한 '하늘의 도 天道'와 '사람의 도 人道' 사이의 작동원리에서 유래한 개념이라는 사실과, 변變과 화化는 세트로 붙어 다니는 글자가 아니고 둘 사이에 철학적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자.
원전原典에서 변變은 변하는 과정이며 화化는 변함의 결과로 새긴다. 요즘 많이 쓰는 단어 '변화變化'는 단순히 변變의 개념만 강조함으로써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밋밋해진 느낌을 갖는다.
글의 뜻과 철학을 깊이 있게 사유하게 된 우리의 아이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차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인 ' Metaphysics'를 왜 동양 고전 주역周易이 출전인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번역을 하는지, 혹시 두 개념에 차이는 없는지도 궁금해지겠지. 그러다 보면, 원컨대
거꾸로 한자어를 보완할 고유어도 찾아보게 되고,
동시에 말랑말랑한 우리말의 참맛을 느끼게 되고,
시키지 않아도 서서히 고유어로 말하고 쓰는 버릇이 생기고,
점점 더 새로운 말을 발굴하게 되고,
한국어는 고유어와 한자어가 상생하는 품격 있는 언어가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매買-매賣' 같이 공연히 헷갈리는 한자들은 우선적으로 고유어 '사다-팔다' 에 도태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은 실용적이고 영리하니까.
한자어가 오래 점령해온 '영토'는 현상태에서 '자치령'으로 승격시키되 확대하지는 못하도록 단속한다. 한편 근래에 허술한 국경을 넘어 들어와 파죽지세로 전국을 짓밟는 '영어'는 어떻게 할지 선택적으로 판단한다. 한자어 자치령과 고유어 지역은 서로 교류하며 힘을 합한다. 늘어나는 한국어 영토는 온전히 고유어 땅이다. 한자어 자치령도 점점 고유어 땅으로 편입된다. 광개토 대왕이 생각난다.
왜승모 라고쓰는 아이는 모母-->숙모叔母 -->외숙모外叔母 의 친족 간 호칭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삼춘?, 숭모?, 왜승모를 각각 동떨어진 말로 기억한다. 원리를 모르면 1+2=3 도 구구단처럼 통째로 외워야 한다. 그러면 불편해진다.
불편하면 말하기 싫어진다.
하기 싫은 말은 없어진다.
왜승모도, 외숙모도, 아줌마도 없어지면 뭐라고 부르나,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