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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Aug 08. 2022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행복한 밤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20~22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 20

허먼 - 테베츠

51km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보니 나무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 만난 한국인 여행자는 오는 길에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그걸 주운 누군가가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해서 여기서 하루 이틀 더 있다가 출발한다고 했다. 나는 날이 심하게 흐리고 바람이 심상치 않아 출발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천천히 먼저 가보기로 했다.




출발하려는데 허먼에서 파머스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구경도 하고 베이글을 샀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먹구름과 심상치 않은 바람을 가르며 달리다, 결국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만났다. 나무 아래로 피해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파머스마켓에서 산 베이글을 먹었다. 그런데 나무 아래에서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더 거세지기 시작해서 근처에 보이는 집으로 달려가 잠시 비 좀 피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그런데 잠시 후 비를 피할 수 있을만한 데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시며 블러프턴이라는

곳까지 데려다주셨다.






블러프턴은 종교행사로 케이티 트레일을 걸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서 인터넷 신호도 잘 잡히지 않았다.


춥고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캠핑장이 있긴 한데 비가 많이 오니 캠핑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도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비가 그쳐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비가 개면서 너무 예쁜 하늘을 보여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르고 깨끗한 하늘을. 달리는 자전거 안장 위에서 계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케이티 트레일을 즐기는 사람들


좀 더 가니 트레일헤드가 나와 사람들과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가, 미주리 강 위로 구름이 예쁘게 흐르고 있는 풍경 앞 벤치에 자전거를 세우고 점심을 먹으며 쉬었다.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강물은 그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흘렀다. 바람이 기분 좋게 스쳤고 포키는 평화롭게 낮잠을 잤다. 사실 오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괜히 출발했나 싶었는데, 오후가 되니 너무 잘 왔다 싶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비 갠 뒤의 하늘이 특히 더 예쁘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한 날이었다.





케이티 트레일에 위치한 마을 중 테베츠에는 여행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무료 쉘터가 있었다.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고, 침대는 어쩐지 찝찝해 보여서 방 한쪽에 텐트를 쳤다.


저녁을 먹고 텐트에 누워 뒹굴뒹굴 쉬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텐트 밖으로 나가보니 남자 두 명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근교 도시 콜롬비아에서 온 미국인들로 연휴를 맞아 케이티 트레일에서 라이딩을 즐기는 중이었다. 이름은 제프와 조디. 방안에 텐트를 치고 있는 상황이 조금 민망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Day 21

테베츠 - 콜롬비아

80km


제프와 조디와의 기분 좋은 만남을 뒤로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오늘따라 자전거도 잘 나가고 왜 이리 기분이 좋지? 자전거가 잘 나가는 건 길이 좋기 때문일까 마음이 좋기 때문일까?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데다, 포키도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가다 보니 보조배터리를 쉘터에 놓고 온 것 같아 제프에게 연락해 출발할 때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중간에 클레이스빌이라는 마을에 잠시 멈췄는데 사람이 바글거리는 식당 하나가 보였다. 가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제프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출발이 늦어져서 쿠퍼스에나 가야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요.'

'네, 저는 지금 클레이스빌이에요.’

'혹시 클레이스빌에 있는 식당에 가려고요? 맛있어요 거기.'

덕분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치킨 3조각, 그린빈, 매시트포테이토, 빵 2개와 버터, 애플소스, 코울슬로까지. 너무 맛있어서 먹는 내내 마냥 행복했다. 먹고 있는데 제프와 조디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출발이 늦어졌다고 하길래 오후 늦게나 만나게 될 줄 알았던 터라, 뜻밖의 만남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내게 배터리를 건네준 뒤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섰고, 나도 배불리 밥을 먹은 뒤 다시 출발했다.




요 며칠은 '와, 그림 같다'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오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구름만 올려다봐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츠버그에서 제프와 조디를 또다시 마주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벌써 4시라 해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만큼, 갈길이 바빴던 나는 먼저 출발했다.




최고의 동행


그런데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이 너무 예뻐서 자꾸만 자전거를 멈추게 되었다. 멈춰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제프와 조디가 뒤에서 또다시 등장. 결국 같이 라이딩을 하였다. 조디의 스피커에선 컨트리 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마치 배경음악의 일부 같았다. 이 시간이 참 좋아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속도도 그다지 뒤처지지 않는 날이었다.


어느새 쿠퍼스 캠핑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주말을 맞아 나들이 온 사람들이 미주리강으로 지는 일몰을 기다리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캠핑장에 반려동물 동반이 안된다고 했다. 마침 제프도 웜샤워 호스트로 등록해뒀던 터라, 제프가 자기네 집에서 자도 된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포키에게 관심 보이는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일몰을 본 뒤 제프, 조디와 함께 제프의 집을 향해 야간 라이딩을 시작했다. 밤이지만 두 남자와 같이 있으니 너무 든든했다. 다른 건 하나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넘어지지 않도록 바닥만 주의 깊게 살피며 어둠 속에서의 라이딩을 즐겼다.


이윽고 주위가 완전히 깜깜해졌고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이딩을 하다가 잠깐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때마다 보이는 별들이 얼마나 낭만적이던지. 잠시 다리 위에 멈췄을 때, 조디가 말했다.


“브리지 파티(bridge party)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리 철구조물 사이로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우리는 파티를 즐겼다. 이런 밤의 여유라니. 깜깜한 밤에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롭게 별을 감상하는 건 혼자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몇 번의 힘겨운 언덕이 있었는데 옆에서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힘내서 오를 수 있었다. 함께 20킬로미터 정도를 달려 드디어 제프네 집에 도착했다. 아내 다이엔, 아들 퀸과 함께 세 식구가 사는 집이었다. 제프는 아들에게 씻었냐고 물어본 뒤, 씻었다고 하니까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아들을 껴안으며 장난을 쳤다.




토마토 미트소스 파스타와 치즈, 파프리카, 오이, 양상추가 들어간 샐러드, 그리고 마늘빵. 아주 맛있는 저녁식사를 배불리 먹은 뒤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사실에 어쩐지 행복해지는 밤이었다.




Day 22

콜롬비아 - 파일럿 그로브

74km



안고싶게 생긴 뒤통수


제프네 집은 창밖으로 키 큰 나무들이 보여 마치 숲 속의 집에 있는듯한 느낌을 주었고, 집안 곳곳의 장식품에선 그의 자전거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아침으로 갓 구운 크루아상 사이에 햄과 계란프라이, 모차렐라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와 블랙커피, 오렌지주스를 먹었다. 우리는 보통 커피면 커피, 주스면 주스 한 가지만 마시는데, 미국에선 커피 마시겠다고 하면, '주스도 마실래? 우유는?' 하고 물어보곤 했다.


제프네 집


밥을 먹은 뒤 제프가 내게 앞으로 엘에이까지 어떻게 가면 좋을지 지도를 보며 설명해주었고, 트레일이 시작되는 곳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해서 2마일 정도 함께 라이딩을 했다.


어제 길에서 몇 번이나 다시 마주친 끝에 하루를 신세 지고 마침내 제프와 진짜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기분 좋게 라이딩을 시작했다.



어젯밤 브리지 파티를 했던 다리



월요일이지만 콜럼버스 데이라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중 단연 가장 인상 깊었던 모습은 유모차를 밀며 조깅하는 엄마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게 여행이 재밌냐고 묻기에 나는 대답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행복해요."




그리고 오늘 드디어 1,000km를 찍었다.



기념사진 with 졸린 포키


그리고 그날 오후 한국인 여행자와 다시 합류한 뒤 파일럿 그로브에 도착하여 시티파크에 텐트를 치고 함께 저녁을 해 먹었다.



꼭 기억하고 싶은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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