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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Jul 21. 2022

살구잼과 토마토와 너만 있으면

강아지와 미국 90일 자전거여행 Day12~15


Day 12

링컨-채텀

82km





다음날 아침, 텐트 밖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조(공원 관리인 아저씨)와 그의 시스터였다. 조는 오늘도 계속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 물으며 도와주고 싶어 했다. 핸드폰 배터리도 충전하게 해 주고 물도 주셨다. 그리고 열매 하나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칠엽수 나무 열매(buck eye)예요. 굿 럭을 의미해요."


조는 마지막까지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하며 자전거 체인이 마른 거 같다며 체인 오일을 발라주었다.





오늘도 잘 곳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 끝없는 옥수수밭과 콩밭을 따라 달리다가 스프링필드라는 큰 도시에 도착하여 소방서에 가봤는데 닫혀 있었다. 아직 해 질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서 더 달려 보기로 했다.





가끔씩 포키는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해져 옆을 보게 된다.




트레일길을 따라 다음 도시인 채텀까지 갔다. 소방서에 들어가 마을에 텐트 칠만한 장소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공원이 있긴 한데... 보통은 어디서 자요?" 소방관이 물었다.

"보통 허락 맡고 공원에 텐트 치고 자요."

"공원에서 자도 되는지 경찰에게 물어봐줄게요."

잠시 뒤 소방서에 도착한 경찰이 잘 모르겠다며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교회 뒤뜰에 텐트를 쳐도 되는지 물어봐 주셨다. 그러자 또 잠시 뒤 교회 목사님이 트럭을 타고 소방서로 오셨다.

"10마일 정도 거리에 캠핑장이 있는데, 내가 캠핑장비 내줄 테니 캠핑장에서 샤워도 하고 편하게 자는 게 어때요?"

그래서 목사님 차에 자전거를 싣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캠핑장에서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스페인에서 오신 56세 아주머니로, 그녀 역시 혼자서 시카고에서 엘에이까지 자전거로 미국 횡단 중이신데 속도는 나보다 2배는 더 빠르시다. 내가 일주일 걸려서 온 이곳을 3일 만에 오셨다고 한다.



샤워를 한 뒤 날씨가 좋아서 텐트 밖에서 별을 보며 저녁으로 주스와 감자칩을 먹었다. 점점 추워져서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추운 밤이었다.





Day 13

채텀-리치필드

67km



매일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한다. 새소리를 들으며 포키가 여전히 침낭 속에 파묻혀 편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좋다. 아침에 텐트 문만 열면 바로 야외니까 포키도 좋아하는 것 같다.





오늘은 출발할 때 바람도 선선하고 하늘도 예뻐서 기분이 좋았는데, 속도는 나지 않는 날이었다. 점심 먹을 서브웨이까지 가는 내내 머릿속으로 서브웨이 샌드위치만 생각했다.



오늘은 리치필드라는 도시의 소방서를 목표로 달렸다. 옥수수밭과 콩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떠 있는 달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으려고 멈췄다가 뒤를 돌아보니 개 두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급하게 사진을 찍고 서둘러 떠났다.






리치필드에 도착해 월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에어매트도 사고 장 본 걸로 맛있게 저녁 먹을 즐거운 생각을 하며(특히 시원한 오렌지주스를 마실 생각에 설레며) 소방서를 향해 가고 있는데 불이 켜진 교회가 있길래 가까이 가봤다. 포키를 보고 귀여워하며 다가온 사람들에게 텐트칠 곳을 찾고 있다고 하니 교회 뒤뜰에 텐트를 치게 해 주었고, 밥은 먹었냐며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주말이라 그런지 교회에 사람이 많았고, 모두가 친절했다. 특히 사워크림과 치즈 섞어먹는 게 너무 맛있었다.


몇몇 꼬마 아이들이 내가 신기한지 밥을 먹고 있는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잘 못 알아들어서 몇 번이고 다시 묻는 내게 아이들은 친절하게 몇 번이고 이야기해주었다. '하나'라는 여자아이는 내게 핸드폰 번호를 주며 엘에이에 도착하면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텐트로 돌아가 월마트에서 산 매트를 펴려고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페달을 밟아 2킬로미터 거리의 월마트로 다시 가서 매트와 젤리, 참치가 들어있는 봉지를 찾아왔다.



교회 뒤뜰이긴 해도 바로 도로 옆이라 무섭긴 한데 텐트 안에만 들어가면 바깥 풍경은 잊히고 그저 우리만의 아늑한 공간이 된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간다.





Day 14

리치필드-글렌카본

60km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다 보면 5초 후에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느껴질 만큼 차들이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래도 오늘은 자전거길이 너무 좋아서 자갈이나 차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노래 가사와 풍경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난데없이 슬퍼졌다가, 난데없이 행복했다. 길이 좋으니 포키도 안정감을 느꼈는지 자면서 갔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속에 앉아 식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햇살이 등을 따사롭게 데워주었고 포키는 내 무릎에 누워 낮잠을 잤다. 나도 여기 누워 늘어지게 한숨 자고 싶은 날이었다.



미리 웜샤워에서 연락해두었던 글렌카본의 호스트 집에 도착했다. 부부와 딸. 세 명의 가족이 사는 집이었는데 가족들이 모두 각자 할 일을 해서 나도 편하게 할 일을 하며 쉬었다. 피자를 시켜주셔서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피자를 먹어보았는데 너무 맛있어서 세 조각을 먹었다.


졸음이 오는 걸 참으며 빨래 건조기가 다 돌아가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빨래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잠을 자려고 누워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이,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고가 발생하였고, 58명이 목숨을 잃었다.







Day 15

글렌카본 - 페레 마르케테 주립공원

74km




오늘의 목적지인 페레 마르케테 주립공원까지 어느 길로 가는 게 좋을지 호스트가 알려준 덕분에 너무 좋은 길에서 라이딩을 했다. 쭉..너무 좋았는데... 주립공원 입구에서부터 최악의 길을 만났다.






공원 입구로 들어서 캠핑장 표시를 따라갔는데 이제껏 미국에서 만난 오르막 중 가장 가파른 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왜 자꾸 날파리가 꼬이는지. 어제 씻었는데.

오르막인 데다 한 손으로는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한 손으로는 날파리를 쫓아야 했다. 얼마나 전망 좋은 캠핑장이길래 이렇게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올라야 하는 거지? 길 이름이 scenic 도로(경치좋은 도로)였던 만큼, 나름 기대까지 하며 끝까지 가 보았다. 이렇게 고생해서 끝까지 간 보람이 있을만한 멋진 캠핑장이 나왔다면 괜찮은 결말이었겠지만, 캠핑장은 결코 나오지 않았고, 1시간 반 동안 자전거를 끌고 간 결과 공원 출구가 나왔다. 그것도 출구를 나가니 아까 달리던 100번 도로였고, 캠핑장은 바로 도로 옆에 있었다. 공원 입구로 들어가지 않고 100번 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왔으면 캠핑장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그 언덕길에서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겠나. 이젠 다 내려왔고 그 길이 끝났으니 그만 잊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수밖에.



굳이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해서 억울했지만 침착하게 텐트를 치고 오렌지와 아까 먹다 남아 싸온 타코로 허기를 달랬다. 내 짜증이 전해졌던지 풀이 죽은 듯해 보이던 포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가 텐트 치고 있는 사이 저 멀리 수풀에 가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불러도 오지 않더니, 결국 몸에 온갖 풀씨 같은 것들을 묻혀 왔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꼬이는 날파리들과 모기들을 피해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벌레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우리만의 아늑한 공간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 비록 비좁은 1인용 텐트일지라도.



포키는 껌을 먹는 동안 나는 바게트에 살구잼을 바르고 토마토 한 조각을 올려 찬물에 탄 카누와 함께 먹었다.

스마트폰에선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맛있고, 행복한 거지. 좀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짜증이 났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껌을 다 먹은 포키가 내 옆에 다가와 토마토를 탐낸다.

포키와 토마토를 나눠먹었다.



포키는 이제 자고

나는 엎드려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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