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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Aug 18. 2022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여행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 23~26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 23

파일럿 그로브 - 세달리아

54km



천둥소리가 귀를 때리고 빗줄기는 천둥소리를 덮을 기세로 거세지고 있었다. 아침 8시가 다 돼가고 있는 시각. 비가 와서 오늘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운 마음 반, 비가 오니 서둘러 일어나지 않고 침낭 속에서 더 꾸물거려도 되니 잘됐다 싶은 마음 반.


비가 그칠 것 같아서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고 떠날 준비를 했다. 텐트 바닥에 물이 흥건해서 휴지로 닦아내고 에어매트도 물기를 닦아 접었다. 짐들을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다 들어가긴 하지만 가방을 닫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텐트도 아직 덜 말랐지만 접어서 넣었다. 시리얼로는 부족해서 커피와 베이글에 살구잼을 발라 먹고 출발했다.


이날은 추워서 자전거를 타도 좀처럼 더워지지 않았다. 트레일 헤드도 나오지 않아 쉴 타이밍을 찾지 못하다가, 20킬로미터 정도 갔을 때 벤치가 나와 앉아서 초콜릿과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여전히 추웠고,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포키 가방은 닫고 나는 우비를 입었다. 춥고 너무 지쳤다. 그래서 오늘은 세달리아까지만 가기로 했다.



세달리아 소방서에 도착해 텐트 칠만한 곳을 물어보니 근처 캠핑장을 알려주었다.

달러제너럴에서 장을 본 뒤, 소방관이 알려준 대로 스테이트페어에 가서 캠핑장을 찾아보았는데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시티파크에 가서 텐트 치기로 하고 가고 있는데 다시 빗줄기가 거세져서 잠시 지붕 아래로 피했다. 그때 동행중인 한국인 여행자가 웜 샤워 사이트를 찾아보니 세달리아에 호스트가 있어서 즉석에서 메시지를 보내보았는데 와도 된다고 해서 호스트 집으로 향했다. 처음엔 집 마당에 텐트를 치게 해 주셔서 텐트를 쳤는데 안에 들어와 거실에서 자도 된다고 해서 거실 바닥에서 침낭을 덮고 잤다.



따뜻하게 샤워도 하고 배불리 먹고 실내에서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점점 추워지려나 보다.







Day 24

세달리아 - 클린턴

65km





어느 길로 가든 내겐 중요하지 않다.



자전거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자전거 여행이 아니었다면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이름 모를 마을에 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 역시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고 누군가에겐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평생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 멈춘 마을의 주유소 앞에서 빵을 먹는 경험도 내겐 유명 관광지를 방문하는 일 못지 않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어느 이름 모를 주유소 앞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주유소





Day 25

클린턴 - 몬트로즈 호수

23km


어젯밤 캠핑한 곳


어제 장을 볼 때 우유를 샀다. 다시 말해 우유를 가지고 다녀도 될 만큼 추운 계절이 찾아왔다는 얘기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짐 정리를 했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혼자가 되고 싶었는데, 텐트 문을 열었을 때 차디찬 바람만이 나를 맞아줄 거라 생각하니 이상했다.


케이티 트레일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와는 서로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케이티 트레일에서만 잠시 동행하기로 했었고, 케이티 트레일이 끝나고 일반 도로가 시작되는 오늘 헤어졌다. 우리는 총 4일 정도 함께 했다.


오랜만에 트레일을 빠져나와 일반 도로를 달리니 좋았다.






그런데 가다 보니 자갈길이 나왔다. 너무 울퉁불퉁해서 자전거를 타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끌고 가던 중에 픽업트럭 한 대를 만났다. 아저씨에게 자갈길 끝날 때까지만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아저씨가 몬트로즈 호수에서 캠핑을 해볼 것을 추천하셨다.


오늘 아직 23킬로미터밖에 오지 않았지만, 급할 것도 없고 우연에 의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호수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호수에 도착했는데 너무 평화롭고 이곳에서 포키와 단둘이 오후와 밤, 내일 아침까지 보낼 생각을 하니 너무 좋았다. 물이 다 떨어져서 아저씨 차를 타고 4마일 거리의 몬트로즈 중심가로 가서 물을 산 뒤 다시 호수로 돌아왔다.


아까 자갈길에서 픽업트럭에 자전거를 싣다가 자전거 킥스탠드가 망가졌는데, 아저씨는 괜히 나 때문에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라며 차에 있는 공구를 꺼내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스탠드를 고쳐 주셨다. 편의점에선 포키 주라며 땅콩쿠키를 사주셨고, 내가 건넨 주스는 끝내 사양하셨다. 아저씨는 옥수수, 콩, 당근 등을 재배하는 농장을 운영하고 계시다고 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추천해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이곳의 분위기는 결코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글로는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 왜 그런 곳 있지 않은가. 시간이 넘쳐흐르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있는 1분 1초가 너무 귀해서 왠지 조바심이 나는 그런 곳. 호수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물소리, 바람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 새소리가 전부였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나무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는 가운데, 따스한 햇살 아래 포키가 낮잠을 자고 있다.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는 마치 물결치는 소리같이 들렸는데 나는 특히 그 소리가 좋았다.






저 멀리엔 한 아저씨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햇빛에 나가면 뜨겁고 그늘에 들어오면 춥다. 바람이 강해서 텐트 치느라 애먹었지만 결코 싫지 않은 바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텐트 문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며 텐트 안에 누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4시였다. 어제 장을 봐 둔 덕에 먹을 거 걱정은 없었다. 우유, 주스, 라면, 빵, 초콜릿, 과자, 심지어 술까지 있었다. 포키도 간만에 푹 쉬는 것 같고, 나도 오랜만에 책 읽을 여유도 가졌다.



이윽고 낚시하던 아저씨마저 떠나고 해가지고 온통 깜깜해진 숲 속 호숫가. 나는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의 밤이란 게 이런 거구나. 풀벌레 소리, 환호성 소리 같은 이름 모를 동물 소리가 들려온다. 그나마 개 짖는 소리가 들려 근처에 마을이 있구나 하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텐트 밖으로 나가서 감자칩을 가져올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러지 못했다. 오리 울음소리, 그리고 아무도 없는데 깡통 찌그러뜨리는 소리는 왜 나는 거지? 너무 무서웠다. 밖을 내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뿐. 포키는 그러거나 말거나 잘만 잔다. 강아지들은 원래 낮에도 많이 자는데 자전거 타느라 낮에 못 자서 그럴 것이다.




오늘 또 하나 배웠다. 아무도 없어서 너무 평화롭고 예쁜 곳일수록 밤엔 무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이토록 겁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암흑이다. 밖에 나가면 별이 많이 보일 것 같은데 차마 나가지 못하겠다. 텐트 가까이에서 동물이 킁킁거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한참을 침도 삼키지 못하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상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그게 무서운 야생동물의 소리로만 들렸다. 나를 덮치면 어쩌지? 정체 모를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러다 소변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 마침내 텐트 밖으로 나갔다. 별이 아주 선명하고 가깝게 보였다. 나무에 가려 탁 트인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호수 가득 별이 쏟아져 있었다.




Day 26

몬트로즈 호수 - 리치힐

63km



아침의 호수는 다시 평화롭다. 호수의 낮과 밤이 얼마나 다른지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어떤 삶이 맞는 건지 과연 어느 누구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느리지만 내게도 조금의 시간만 더 있다면 도착할 수 있다는 것, 잘해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맞바람과 싸우며, 때로는 자갈길을 달리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오늘도 역시 어디서 자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적당한 거리의 마을을 목적지로 정하고 출발했다.




종종 강아지 줄 물이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도 한 아주머니가 차를 세우더니 물이 필요하냐기에 물은 있는데 혹시 사료가 있냐고 물으니 집이 근처라 가져다주겠다고 하셨다.


잠시 후 다시 오신 아주머니는 지퍼백 가득 사료를 담아 건네주셨다. 그리고 가다가 음료수 사 마시라며 주머니 있던 잔돈을 모아 2.25달러를 손에 쥐어 주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보통은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어서 차를 세우지 않는데, 당신은 전혀 위험해 보이지가 않아서 처음으로 차를 세웠어요."


아마 포키가 한몫 톡톡히 했을 것이다. 그녀도 강아지 다섯 마리를 키우는지라 포키를 예뻐하셨다. 길 위의 오아시스 같은 사람들, 그 덕분에 오늘도 앞으로 나아간다.


복덩어리



오늘의 목적지로 정하였던 리치힐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공원에 텐트를 칠 수 있을까 하여 시청에 가서 물어봤으나 여기선 안되고 20마일(32킬로미터)을 더 가면 텐트 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다. 32킬로미터를 더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은 나는, 한 달 가까이 고생했으니 한 번쯤은 모텔에서 자도 되지 않겠냐고 합리화를 한 뒤 모텔로 향했다.


제일 싼 방을 달라는 내게 주인아주머니는 말했다.

"당신 같은 여행자는 처음 봐요. 당신에게 방을 무료로 줄게요."


어제는 정체모를 동물들 울음소리에 잠을 설쳤는데, 오늘은 모텔방에서, 그것도 무료로 푹 잘 수 있게 되었다.




노래를 들으며 마트에 가서 장을 봐 왔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이 여행이 난 참 좋다.






포키 너도 좋구나?




편하게 푹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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