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이별
“나를 좋아해 주는 남자, 내가 좋아하는 남자 둘 중에 누구랑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
수영장 사우나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곳에선 도무지 그 무엇도 숨길 수가 없다. 밖에서 만났다면 살을 빼야겠다는 말에 도대체 네가 뺄 살이 어디 있냐며 발끈할 사람들도 수영장 사우나에서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린다. 수영장 언니들의 거침없는 답변들이 이어졌다.
“무조건 나 좋다는 남자랑 결혼해야지! 안 그래도 결혼하면 사람이 180도로 변하는데……. 맘 편한 게 최고야.”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어떻게 살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살아야지!”
유독 늘씬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언니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가 자기 이상형이어야만 한다고 열을 내며 말했지만, 그날 대다수의 의견은 자기를 좋아해 주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어차피 살다 보면 그놈이 그놈이라는 결론이었다.
벌거벗은 알몸 토론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대학교 입학 후 난생처음으로 사귀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나를 좋아해 줬던 남자. 그러나 난 내가 더 좋아하는 남자를 택했다.
“우리 헤어지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유 없는 이별 통보를 받고도 그는 예상했다는 듯 날 붙잡지 않았다. 내 마음대로 결정한 일방적인 이별이었다. 특별히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자와 사귀기로 한 순간부터 나는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나는 동안에도 늘 머릿속에는 어떻게 헤어질지를 생각했다. 마치 이별이 하고 싶어서 만남을 지속해 왔던 것처럼.
그와의 이별을 생각할 때면 명치 쪽 어딘가가 쪼그라드는 것 같은 찌르르한 아픔이 동반했다. 슬퍼할 그를 생각하며 한없이 죄책감에 젖어들기도 했다. 나 또한 그 없이 지낼 생각을 하니 쓸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막상 그와 만나면 즐거웠지만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엔 늘 그와 헤어지는 상상을 했다.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대학교 동아리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사실 나는 그날의 그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1년 선배였던 그가 신입 부원 중에 나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었다. 동아리 선배가 밥 사준다고 해서 동기들과 몇 번 불려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눈도장 찍으려고 밥을 사느라 돈을 꽤 많이 썼노라고 나중에 고백했다. 그렇게 몇 주 후에 동아리 엠티를 떠났다. 다 같이 모여 앉아 게임도 하고 술도 마시는 자리에서 그 선배가 갑자기 나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다른 동기와 선배들은 환호하며 나와 그를 밖으로 내몰더니 나보고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까지 했다.
당황스러웠다. 뭔가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은 조급함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초, 중, 고등학교 내내 공부만 하느라 연애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그가 너무나 고마웠지만 미안하게도 그는 그렇게 썩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다 보면 점점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예스”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공을 들이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참 재미있었다. 내 평생에 이런 대접을 언제 받아보나 싶을 정도로 우쭐해지기도 했다. 분명 동성 친구들 사이에선 느껴볼 수 없었던 짜릿함이 있었다. 어딜 가도 늘 그와 함께 다녔다. 덕분에 인간관계가 넓어졌다. 나 혼자였으면 절대로 알 수 없을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또 왠지 누구의 여자친구라는 명함이 썩 나쁘진 않았다. 친구들과 밤늦게 놀다가도 남자친구가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라고 걱정해 주는 연락을 받는 것도, 밤새도록 문자나 전화를 주고받는 것도 새로운 자극이었다.
그러나 그와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가 힘들었다.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싸워도 먼저 사과하는 것은 늘 그였고, 연락도 항상 그가 먼저 했다. 조금만 연락이 안 된다 싶어도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나 싶었고, 그가 나에게 서운함을 조금만 내비쳐도 마음이 싸늘해졌다. 언젠가는 그의 어머니를 우연히 만났는데 나에게 자기 아들이 임용 공부를 잘 안 하는 것 같으니, 공부 열심히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을 듣고도 바로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의 외도로 가정불화가 있었다는 그의 푸념도 헤어질 결심에 불을 지폈다.
막상 헤어져 보니 이별이란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별, 그게 뭐 대수라고?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후회하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그동안 나의 배려 없었던 행동들에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때 그는 진짜로 한 1년 정도 기다릴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크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 되레 이별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매일 울었다. 괜히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마저 들면서 후회하느라 매일 밤 그에게 전화하지 않게 내 모든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 세상 모든 이별 노래가 나를 위한 노래인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그에게 못되게 굴었을까. 이제 이별이 뭔지 경험해 봤으니 다시 받아달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슬픔에 잠겨 술에 취해 살기를 몇 개월. 이별에 대한 애도의 기간은 그렇게 끝났다. 이별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더니 너무나 철없었던 나의 마음이 한층 어른이 되었다. 어느 순간 단단해진 내 마음은 그를 봐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느냐는 장문의 문자였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버렸다.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두 번째 연애는 내가 너무 좋아서 죽자 살자 매달렸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속도만큼 그의 마음이 뒤따라오지 못했다. 누군가 연애는 ‘이어달리기’와 같다고 했다. 전에 사람한테 받은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저번 사람한테 당한 걸 이번 사람한테 푸는 불공정하고 이상한 게임이라고. 그 더딘 속도에 애간장을 무수히도 많이 녹였다. 그는 내게 몇 번이나 이별을 고했지만, 나는 모든 이별을 거부했다. 이보다 더 애처로울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저자세를 취하며 한없이 비굴하게 굴었다. 그렇게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의 결혼으로 그간의 마음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당연히 지금은 나보다 남편이 나에게 더 집착한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이별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철없던 어린 시절의 꿈과 이별하고, 나에게 상처 주는 것들과 이별하고, 젊음과, 어제의 나와 이별하며, 익숙함과 이별한다. 이 모든 이별은 우리를 한 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를 좋아해 주는 남자,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해진 것은 없다. 나를 좋아해 주든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상태이든 주저하지 말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지금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별 후 내가 한층 성숙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